이형기, 분수
너는 언제나 한 순간에 전부를 산다
그리고 또
일시에 전부가 부서진다
부서짐이 곧 삶의 전부인
너는 모순의 물보라
그 속엔 하늘을 건너는 다리
무지개가 서 있다
그러나 너는 꿈에 취하지 않는다
열띠지도 않는다
서늘하게 깨어 있는
천 개 만 개의 눈빛을 반짝이면서
다만 허무를 꽃피운다
오 분수, 냉담한 정열!
이응준, 단 한 사람
어디에도 그가 없는 저녁
그녀는 자신에 관한 소식을 듣는다. 그는 지워진다
가 버린 청춘은 이야기도 아니고 노래도 아니었기에
나의 너도
너의 나도 아닌 그는 그저 단 한 사람
무엇으로도 그를 기념할 수 없는 저녁
그녀는 사막에서 고래의 눈동자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가 버린 청춘은 가혹하고 아름다움은 엄두가 나질 않아
사막에 엎드려 있는 고래의 눈동자 속에 우두커니 서서
폭풍우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없지만
여기 있다. 그를 기다리는 단 한 사람
죽음처럼 옷깃을 여미고 말없이 반문하는
그의 단 한 사람. 사막에 쓰러져 있는 고래의 눈동자 속
눈물이 되어
폭풍우를 기다리는 단 한 사람
나의 너도
너의 나도 아닌
그저 오래도록
단 한 사람
김선우, 술잔, 바람의 말
그녀의 입술이 내 가슴에 닿았을 때
알 수 있었다, 흔적
휘파람처럼 상처가 벌어지며
그녀가 나의 세계로 걸어들어왔다
유리잔 이전이었던 세계, 바람이 나를 낳고
달빛이 이마를 쓸어주던 단 한줌 모래이던 때
그때 아직 그리움은 배냇누이라서
알 수 있었다, 내게로 온 그녀는
날개 상한 벌을 백일홍 붉은 꽃잎 속에 넣어주던
마음을 다치기 이전의 그녀였다
우리는 달빛 속에서 오래도록 춤을 추었다
그녀의 등줄기를 따라 바람이 강물을 길어왔고
입을 것이 없었으므로 맨몸인 우리는
상처에 꽃잎을 달아줄 수 있었다 한줌 모래이던
사금파리 별을 잉태했던 우리는
날이 밝기 전 그녀는 떠날 준비를 했다
길은 지워져
달빛도 백일홍 꽃잎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그녀는 다시 왔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희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인지 아느냐
몇 마디 욕지거릴 씹어뱉고 독주를 들이켜더니
화장을 고치고 나가버렸다
내 가슴에 선명한 입술자국
붉은 씨방을 열고 백일홍 꽃잎 떨어져내렸다
임윤식, 인수봉
팽팽한 끈 하나에 전 생(生)을 건다
날카로운 바람이 암벽을 치고 밀려와
나를 흔들어 봐도
아직은 밀려날 수 없는 내 자유
당당히 버틴다
절정은 어디인가
하늘에 걸린 봉우리
그곳에 오르면 다시 올라야 할
또 다른 정상이 거기 있다
저 혼자 외롭다
날아라 날아라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마지막 하늘 끝까지
절벽 난간에서 서성이는 그 나비 한 마리
맹숙영, 꿈
만져지는가 하면
사라지는
오색 비눗방울
새벽이 오기 전까지의
밤이슬같이
겨울잠 속에
들어있는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