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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 다시 별
사랑이여
아득히 멀기만 한 사랑이여
내가 여기서 서성이고만 있는 것은
그대 곁에 갈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대를 가까이 하지 못함은
그러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니
그 이유 또한 묻지마라
그 이유가 바로
내 괴로움의 근본이니
배한봉, 빈 곳
암벽 틈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풀꽃도 피어 있다
틈이 생명줄이다
틈이 생명을 낳고 생명을 기른다
틈이 생긴 구석
사람들은 그걸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 팔을 벌리는 것
언제든 안을 준비 돼 있다고
자기 가슴 한 쪽을 비워놓은 것
틈은 아름다운 허점
틈을 가진 사람만이 사랑을 낳고 사랑을 기른다
꽃이 피는 곳
빈곳이 걸어 나온다
상처의 자리. 상처에 살이 차오른 자리
헤아릴 수 없는 쓸쓸함 오래 응시하던 눈빛이 자라는 곳
이재무, 어린 새의 죽음
아침 숲길 걷다가 푸른 죽음을 본다
벌써 굳어 선지가 되어버린 피
송판처럼 딱딱해진 죽음 손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본다 모든 죽음은 산 자들을 경건하고
엄숙하게 한다 비록 그것이 비명횡사일지라도
삶의 옷깃 여미게 하는 것이다
그가 남긴 짧지만 두꺼운 서사를 읽는 동안
수목 사이 웅얼웅얼 걸어오는 바람의 기도 소리와
고른 바닥 굴러가는 청량한 물의 독경 소리가
목도리인 양 추워 가늘게 떠는 어깨 감싼다
죽음을 살아오는 동안 그는 과연 자유를 껴입고
즐거웠을까 장 속의 새가 부러웠을까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말하지만
자유 없는 비참과 양식 없는 고통을
저 흔한 인습의 저울추로 잴 수는 없다
양지바른 언덕 짧게 살다 간
투명한 영혼 잠들지 않고 깨어 있다
묘비명 새겨 마음의 방에 걸어둔다
이제 곧 부패의 시간이 그를 다녀가리라
그는 한 마리 벌레 한 그루 나무
한 포기의 풀로 몸 바꿔 또 다른 생 경영하리라
그의 때 이른 죽음에 내 지나온 생과
다가올 생 포개 심고 돌아와
정결히 손 씻고 밥 한 그릇 달게 비운다
류근, 그리운 우체국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밝혀 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안용태, 독백
당신 것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울 속 늙은 사내마저 내 것 아닌 아침
치약을 짜면서, 비누 샴푸 면도기까지
슈트를 걸치고 구두를 신으면서
내 것인 줄로만 여겨왔던 모든 것들이
내 손으로 만든 게 아무 것도 없구나
어느 날 아침
소낙비가 당신 흔적 지우는 아침
우산을 펼치다 문득
내가 당신 영원한 우산인 줄 알았었는데
어쩌면 이마저도 당신 것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