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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기, 이런 날에는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마음 한 자락 풀어 놓을 수 있는 이런 날에는
혼자 고요에 침잠하고 싶네
내면을 향해 내닫는 깊이의 촉감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이런 날에는
고요의 빗장을 열고 두 손으로 잡고 싶네
빗장 안에서 기다리는 고요의 숙연함에 고개 숙이리
더는 내려앉지 않을 깊이에서 여린 마음 한 움큼 섞어 보겠네
섞일지 어떨지 모르는 절명의 순간을 견디며
이런 날에는 나 하나쯤 잊기로 하네
안도현, 고래를 기다리며
고래를 기다리며
나 장생포 바다에 있었지요
누군가 고래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했지요
설혹 돌아온다고 해도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요
나는 서러워져서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만 바라보았지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
고래를 기다리는 동안
해변의 젖꼭지를 빠는 파도를 보았지요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 바다가 바로
한 마리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손현숙, 담쟁이
온몸으로 너를 더듬어서
변변한 꽃 한번 피워내지 못했지만
상처 많은 네 가슴
내 손으로 만지면서
담장 끝
너를 보듬어 오르다 보면
그때마다
사랑이니 뭐니
그런 것은 몰라도
몸으로 몸의 길을 열다보면
알 길 없던 너의 마음
알 것도 같아
캄캄했던 이 세상
살고 싶기도 하다
류시화, 모란의 연(緣)
어느 생에선가 내가
몇 번이나
당신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선 것을
이 모란이 안다
겹겹이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물러 있다
당신은 본 적 없겠지만
가을 내 심장은 바닥에 떨어진
모란의 붉은 잎이다
돌 위에 흩어져서도 사흘은 더
눈이 아픈
우리 둘만이 아는 봄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란으로부터
멀리 있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당신으로 인해 스무 날하고도 몇 날
불탄 적이 있다는 것을
이 모란이 안다
불면의 불로 봄과 작별했다는 것을
박남준, 아름다운 관계
바위 위에 소나무가 저렇게 싱싱하다니
사람들은 모르지
처음엔 이끼들도 살 수 없었어
아무 것도 키울 수 없던 불모의 바위였지
작은 풀씨들이 날아와 싹을 틔웠지만
이내 말라버리고 말았어
돌도 늙어야 품안이 너른 법
오랜 날이 흘러서야 알게 되었지
그래 아름다운 일이란 때로 늙어갈 수 있기 때문이야
흐르고 흘렀던가
바람에 솔씨 하나 날아와 안겼지
이끼들과 마른 풀들의 틈으로
그 작은 것이 뿌리를 내리다니
비가 오면 바위는 조금이라도 더 빗물을 받으려
굳은 몸을 안타깝게 이리저리 틀었지
사랑이었지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
그리하여 소나무는 자라나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바람을 타고 굽이치는 강물 소리 흐르게 하고
새들을 불러모아 노랫소리 들려주고
뒤돌아본다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 포기를 위해
몸의 한편 내어준 적 있었는가
피워본 적 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