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be6Txn1t7Kg
도종환, 우기
새 한 마리 젖으며 먼 길을 간다
하늘에서 땅 끝까지 적시며 비는 내리고
소리 내어 울진 않았으나
우리도 많은 날 피할 길 없는 빗줄기에 젖으며
남모르는 험한 길을 많이도 지나왔다
하늘은 언제든 비가 되어 적실 듯 무거웠고
세상은 우리를 버려둔 채 낮밤 없이 흘러갔다
살다보면 배지구름 걷히고 하늘 개는 날 있으리라
그런 날 늘 크게 믿으며 여기까지 왔다
새 한 마리 비를 뚫고 말없이 하늘 간다
김혜순, 글씨가 아프다
글이 아파
너무 아파
아파서 울지도 못합니다
귀신들이 읽는 글인데
잉크가 묻지 않는 방법을 쓴 글인데
병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병상에서 쓴 글인데
불에 달군 몸으로 쓴 글인데
보시다시피 시대와 맞지 않는 글인데
문을 닫고 나간 글이 병원 복도에서 울었습니다
새벽을 맞은 뱀파이어처럼 울었습니다
종이는 구겨지고
구겨진 종이 위에 파란 핏줄
핏줄로 짠 먹구름
외로운 우주선처럼 종이 뭉치가 쓰레기통에서 발진합니다
날아라 글
글씨도 없이
가서 먼지 별 가득한 우주 공간의 간호를 받아라
지우개로 지워서 쓴 글인데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뇌의 방들을 매일매일 지운 글인데
그만 좀 가져 가세요
파란 핏줄 글씨는 어디 가고
앙상한 팔목 구겨진 종이 뭉치
희디흰 주먹 한 줌만 남았네
정현종, 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희성, 이곳에 살기 위하여
한밤에 일어나
얼음을 끈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보라, 얼음 밑에서 어떻게
물고기가 숨 쉬고 있는가
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
증오에 대해서
나도 알 만큼은 안다
이곳에 살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싸우다 죽은 나의 친구는 왜 눈을 감지 못하는가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얼음을 꺼야 한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자유를 위해
증오할 것을 증오한다
문현미, 하늘 그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네
넓고 깊은 그곳에는
눈부신 고요의 기러기 가족들
첫 은유의 날개로
미완의 후렴구를 가물가물 남기네
수천만 년 숨은 이야기를
푸른 문장으로 쏟아내는
멀고 먼 그곳에는
세상에 없는 사랑이 있네
세상이 모르는 질서가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