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GP (2013-05-04 16:20:06) 추천:0 / 반대:0 IP:58.***.***.110
해당 글은 퍼온 글이며, 제 개인의 지식이 모자르기 때문에 내용 보강을 위해 올린 글입니다.
그런데 일본서기 부정하면 백제가 일본에 무슨 문물 전해줬다 이런 것도 다 부정되어야 되는데요.
어쨋든 반론 감사합니다.
백제가 열도에 문물을 적은 기록은 일본서기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의 북사 倭 기록을 봅니다.
無文字,唯刻木結繩。敬佛法,於百濟求得佛經,始有文字
(왜는)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 세기거나 매듭을 지었다 불법을 숭배하여 백제에서 불경을 얻으면서 비로소 문자가 시작되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왕인 박사 천자문 이야기가 나옵니다. 백제가 일본에 문자를 전해준 것은 같지만
불교를 통해서 왜에 문자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북사 이야기와 일본서기 이야기는 좀 다릅니다. 어느 것이 사실일까요?
왕인 박사 천자문 이야기는 일본서기 기록으로는 285년 2갑자 인상설에 따라 기년을 조정해도
405년 그런데 천자문은 무척 오래된 책 같지만 502년에 만들어 진 책입니다. 풍림화산이 일본서기를 만화책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서기가 미워서 그런게 아닙니다. 사료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왕인 박사 같은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은유법이지 실제 역사가 아닙니다.
결론: 일본서기에 속지말자. 일본서기 말고도 백제가 왜에 문화를 전해준 기록은 있더라
★ 푸쉬킨 (2013-05-04 11:10:43) (가입:2012-09-13 방문:211) 추천:10 / 반대:0 IP:115.136.***.138
넷상에서 대화를 하며 좀 편하게 진행했으면 합니다. 역게 오유에 재미난 글이 오르고 문장에 오류가 있다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는게 꼽게 생각된다 받아 들여지신다면 굽신굽신이란 표현을 쓰며 댓글이 없어 재탕이란 게시물을 올리지 않으시는게 맞겠죠. 주말에 접속하니 지난번 대화를 한 내용이 본문의 변화도 없이 아직도 의문이라며 그대로 오른 것을 보고 댓글을 달아 드렸을 뿐입니다.
의문을 풀어드리고자 시간을 할애하여 꾀 오랜 시간을 설명을 해드린것 같은데 상대방의 노고에 대한 이야기도 없이 글이 장황하다고 요약해서
올리라는 말씀은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직장상사라도 되시는지요
대화 내용에 대한 피드백도 아니고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자신의 의견 개진도 없이 재탕 삼탕하며 올리는 것은 문제없고
상대방에게 무례한 요구만 한다면 대화를 하자는게 아니겠죠. 좀 더 생각하고 글을 올려주셨음합니다
제 글을 잘 보시면 전 푸쉬킨님에게 명령을 하고 있지 않고 부탁을 하고 있지요. 그리고 웅략 천황이 실존인물이냐고 하는 질문은
보지 못하셨나 보네요. 대답이 없으시네요 제 짧은 글에도 푸쉬킨님은 여러가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황한 님의 글을 읽는 제 입장은 어떻겠습니까 지난 번 대화에서는 이런것이 기억이 나네요. 왜가 중국 梁에 조공한 적이 없다고 하셔서 제가
양나라 때도 왜가 조공을 했다는 중국 정사인 북사 기록을 제시하니까 북사는 믿을 수 없다는 둥.. 사실 님의 장황한 글 읽다가 저런 반응을 보면 허탈해 집니다. 화가 나시리라는 것은 압니다만 솔직한 제 심정입니다. 님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솔직히 그렇습니다.
★ 포도시 (2013-05-04 20:40:12) (가입:2013-04-11 방문:36) 추천:0 / 반대:0 IP:119.203.***.117
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81126150215&Section=04
위 기사를 보면 이미 최소한 503년에 백제 무령왕의 동생이 왜의 왕이 됐죠.
포도시 님이 링크한 저 신문 기사에서는 사실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을 언급하고 싶지는 않구요 다만
열도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반도의 역사와 연동하여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송서 왜 5왕이 처음으로 중국에 등장한 기록은 고구려와 함께 중국 남조에 조공하는 기록입니다. 고구려는
국가의 위상에 맞게 어마어마한 군호를 받지만 왜는 아무런 군호도 못받는.. 즉 송서 왜 5왕의 등장은 반도 남부에서
백제 신라 등이 고구려에 예속되기 시작하면서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들 倭를 성으로 중국과 외교를 했던 송서 왜 5왕은
백제 동성왕이 무녕왕으로 교체 되는 시점에서 끝나고 이후 倭氏 姓이 아닌 아메를 성으로 하고 다리사비고라는 이름을 가진 왜왕이
중국 사서에 등장하게 됩니다. 열도에서 왕조의 교체를 시사하는 부분이죠.
무녕왕 시기는 반도 남부에서 고구려 세력을 몰아내기 시작하던 시기 무녕왕이
중국 남조에 여러차례 고구려를 쳐부수어 다시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라고 하는 표문을 올리던 시기죠
인물 화상경은 이런 반도 남부의 변화가 왜에 어떤 지각 변동을 일으켰나 이해한 다음에 해석할 수 있는 유물입니다.
★ 푸쉬킨 (2013-05-04 11:04:56) (가입:2012-09-13 방문:211) 추천:4 / 반대:0 IP:115.136.***.138
삼국사기의 한수이북의 민호를 마한의 유민으로 보는 관점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디만 백제 5부의 위치도 제대로 고증이 안된 상황에서 단순히 사서 한줄의 기록이 아니라 연천지역 토성과 마한의 관계를 규명하는 내용이라도 추가적으로 설명하셔야 설득력이 높여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더불어 최치원의 표문은 중국의 제왕에게(이극용으로 추정합니다) 삼한일통 사상을 투영한 신라인의 의식을 수사적으로 말한 것이지 실체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삼한론에 대한 것은 예전에도 쓴 기억이 있는듯 합니다.
푸쉬킨님이 올리신 최치원 삼한론에 대한 글 읽었습니다. 역시 장황하게 쓰셨더군요. 마한이 고구려가 되었다는 최치원 발언이
삼한일통 사상을 투영했다는 님의 상상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三韓縣。辰韓為扶余,弁韓為新羅,馬韓為高麗
요사卷三十九志第九 地理志三
요사에도 마한이 고구려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군요. 거란족도 삼한 일통 사상에 관심이 많았던 것인지 참 궁금합니다.
송사에 기록된 고구려 유민이 건국한 정안국을 마한의 종자라고 기록한 이야기 등등.. 최치원 뿐만 아니라 마한-> 고구려 이런 개념은
거란 중국 한족 등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아닐까 보고 있습니다.
★ 일곱난장이 (2013-05-04 13:47:36) (가입:2011-07-27 방문:225) 추천:0 / 반대:0 IP:124.146.***.251
일본에도 진국이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야 알았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진과 한반도 남부의 진이 동일한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드네요.
'진'이 이동해 왔을때 '한'이 동쪽을 분할해서 살게 하였다는 후한서를 비롯한 각종 사서들이 말해 주듯이 진의 민족은 이동하던 유이민의 족속이었고 이들이 추가로 더 이동해서 열도에 정착했을 수는 있습니다만.. 그것을 한반도 남부의 진한이 열도에도 영토를 영위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과한 비약인것 같네요.
삼국유사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처럼 신라 가야 계열 유민들의 열도 이주를 시사하는 기록들은 많습니다. 난장이님의 의심은 매우
건강한 의심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한국에 김씨 성이 흔하듯이 일본에는 하타(秦) 씨가 흔하다고 합니다. 이 씨족과 관련한 것들을 연구해보심이 어떨까요. 추가적으로 이 경우 유물에서도 그런 것을 찾을수 있나 살펴봐야겠지요.아래 NGP 님 질문과 겹치는
내용이므로 NGP 님 답변과 같이 이야기드립니다.
★ NGP (2013-05-04 16:47:55) (가입:2012-11-25 방문:19) 추천:0 / 반대:0 IP:
신라가 일본열도까지 세력을 넓혀서 그쪽에서 국경을 이뤘다면, 일본열도에 신라 유물 같은 것이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현재 열도에서 발견된 신라 유물이 있습니까? 잘 모르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新沢千塚古墳 라고 하는 일본 고분 출토 유물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이고 이 외에도 많습니다. 언제 한번 정리해서
올려드리도록 하지요
삼국유사 연오랑 세오녀 일본의 천일창 설화 이외에도 열도의 신라 세력을 시사하는 사료 하나 소개해 드리고 끝마칩니다.
여기 관리자는 저 댓글 빨리 풀어주시고, 댓글을 하루에 몇개 달 수 있는건지 기준좀 제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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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X錄)》에는, “일본은 극동에 멀리 떨어져 있고 사면이 큰 바다로 둘려 있어, 외국의 군사가 들어갈 수가 없다. 단지 그 연대기(年代記)를 보면, 왜황 응신(應神) 22년에 신라 군사가 명석포(明石浦)에 들어왔다고 되어 있는데, 명석포는 대판(大阪)에서 겨우 1백 리 떨어져 있다. 적간관(赤間關)의 동쪽에 한 구릉(丘X)이 있는데, 왜인이 이를 가리켜 ‘이것이 백마분(白馬墳)인데,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 오니, 일본이 화친하고 군사를 풀어 주기를 청하여 백마(白馬)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다 묻었다.’ 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응신 12년 辛亥(신해, AD351년, 儒禮尼今紀 2년)가 바로 유례왕 8년에 해당되니, 이 해와는 조금 차이가 있으나 대개 같은 때의 사건인데, 東史에는 보이지 않는 것은 글이 빠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