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갈증
1597년 12월 26일 저녁 도산성 삼지환 성문 앞
‘내가 봐도 내 꼴이 우습게 됐구먼….’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질 무렵. 패랭이를 쓰고 다 떨어진 무명옷을 입은 사내가 작은 손수레를 이끌고 도산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레 옆 깃대에는 커다란 백기가 걸려 있었다. 남자와 거리가 떨어진 곳에 우마차를 몰고 온 일단의 무리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핑”
사내 앞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성 위에서 조총을 발사한 것이었다. 잠시 후. 삼지환의 망루에 갑옷을 차려입은 왜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더 접근하면 그 머리통을 날려줄 것이다.”
수레를 이끌고 온 남자는 총소리에 호들갑을 떨다가 왜군 수문장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아이고. 나으리. 살려주십쇼. 저는 지나가던 장사치입니다요. 여기 백기를 보십시오. 저한테는 쇠붙이 하나도 없습니다요.”
성 위의 왜장이 코웃음 치며 말을 이었다.
“일개 장사꾼이 전장에 나타나다니…. 썩 물러가거라. 네놈의 배에 숨구멍을 내놓기 전에. 하하하.”
“하하하”
수문장 이하 성벽에 있던 수비대들이 그를 비웃었다. 사내는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읍소했다.
“아이고…. 나리 도와주십쇼. 저는 원래 중원과 일본을 오가며 미곡장사를 크게 하는 자였습죠. 그런데 여기 명군에 양곡 배달 왔다가 되놈들 때문에 곤경에 빠져습니다요. 이대로 돌아가면 저기 우마차에 있는 명국 놈들한테 맞아 죽습니다요.”
“흠…. 무슨 일을 당했길래 그러느냐?”
“저…. 저놈들이 꾀어서 마장을 했는데…. 분명 저것들이 사기를 처셔….”
“뭐? 마장? 그게 뭐냐? 설마….”
상인은 우물쭈물하다가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중원에서 유행하는 도박인뎁쇼….”
“뭐라는 거냐? 크게 말하거라!”
왜장이 손으로 귀를 쫑긋 세우는 시늉을 하며 반문했다. 그의 질문에 사내는 체념하며 큰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는 곧 결심한 듯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외쳤다.
“도. 박. 해. 서. 패. 가. 망. 신. 했습니다요.”
“아하하”
“낄낄낄”
왜성 위 왜군과 성 밖의 우마차 무리에서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남자는 손으로 머리를 긁으며 무안함을 달랬다.
‘아오. 이 나이에 이게 무슨 고생인가? 산이 녀석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구나. 어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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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렇다네. 여대장”
제독 마귀가 도산성을 공략한 그 날 밤의 일이었다. 다음날 전투를 기다리고 있던 아동포살수대 대장 여여문의 막사에 접반사 이덕형과 이름 모를 명나라 상인이 통사 하나를 그의 막사에 데려왔다. 그에게 어떠한 귀띔도 없이 쳐들어온 것이다. 접반사는 흥분된 얼굴을 하고선 쉴 새 없이 말을 쏟아 냈다.
“이 대감께서 하신 말씀을 정리해보면, 내일 아동포살수대의 출격은 없다는 겁니까?”
“그렇지. 대신에 자네 수하 중 하나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네.”
“무엇입니까?”
이덕형은 숨을 고르고선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익일. 조선군의 공성으로 적의 겉모습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네. 하지만 이 계책을 쓴다면 그들의 속을 상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야. 간략하게 풀어서 말하자면 자네 부하 중 누군가가 왜성으로 들어가 적정을 살피고 더불어 왜놈들의 심사를 뒤틀어 놓고 오면 되는 걸세.”
여여문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이다가 말을 이었다.
“저희 살수대를 선택하신 것은 아마도 왜말에 능통한 자를 원하시는 겁니까? 무슨 계책이라도 있으십니까?”
접반사는 자신 있는 말투로 입술을 움직였다.
“설마 자네들 보고 맨몸으로 잠입하라고 하겠는가. 하여간 믿고 쓸만한 자가 있는가?”
그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여대장은 결심한 듯 말했다.
“제 못난 제자 놈이 이런 일엔 제격인데… 하필 그놈이 오늘 사고를 쳐서….”
“음…. 왜성에서 명군과 실랑이가 있었다는 초관 최산 말하는 건가? 양 경리가 직접 내린 근신처분이라 그자는 안 되겠네. 다른 자를 추천하시게나.”
“다른 아이들은 아직 담이 작아서…. 그냥 제가 직접 가는 게 마음이 편합니다.”
접반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될 말일세. 여대장이 자리를 비우면 누가 아동포살수대를 이끌어나가겠나?”
“그렇다고 생때같은 아이들을 사지로 내몰 수는 없습니다. 조선의 이름난 문사께서 직접 짜신 계책이니 이번 일에 제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겠지요.”
여여문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왠지 슬퍼 보이는 그 모습을 본 접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 맘이 정 그렇다면 내 더는 만류하지는 않겠네.”
“세부계획을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덕형은 여여문의 물음에 옆에 있던 명국 상인을 가리켰다.
“자세한 건 여기 장 대인이 알려줄 것일세.”
장 대인이라 불린 사내는 포권의 예를 여대장에게 올리고선 빙그레 웃으며 말을 꺼냈다.
“여대장께선 마장을 알고 있소?”
그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나오자 여여문은 당황한 듯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마장이라면…. 마작 말이요? 젊었을 때 왜국에 장사하러 온 중원의 상인들이 하는 것은 몇 번 본적이 있소 만은….”
“그럼 됐소. 밖으로 나갑시다. 시간이 없으니…. 내 독한 백주 한 병 준비해주리다. 하하하”
접반사와 장 대인은 그를 끌어내다시피 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식경이 지난 후. 명나라 상인들이 모여 있는 어느 막사가 시끌시끌해졌다.
“억. 이번에는 내가 이길 거요. 꺽.”
조선상인으로 분장한 여여문이 명국인들에게 둘러싸여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독한 냄새를 풍기는 백자 호리병 하나가 들려있었다.
“헤헤. 조선 양반. 이번에 지면 더는 빼앗을 게 없으니 바지라도 벗어서 주시구려. 낄낄.”
같이 마작하는 명나라 사람 하나가 그를 놀렸다. 여여문은 술을 꿀꺽꿀꺽 마시고는 혀가 꼬부라진 말투로 말을 뱉었다.
“무슨…. 소리…. 패 하나만 뜨면…. 대삼원이... 쯔모! 어?”
“쯔모화! 뤼이서요. 이번엔 내가 이겼구려…. 하하하.”
도박에 호구인 조선인 하나를 놀려먹는데 재미를 붙인 명 상인들이었다. 패를 완성한 사내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어이쿠. 이게 다 몇 점인가…. 아까 약조한 데로 더 하려면 입고 있는 바지를 몽땅 벗어서 넘겨야 하오이다. 푸하하”
바지소리에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선 바지춤을 풀어헤쳤다. 그러자 여대장과 마주한 사내가 손가락을 펴서 눈을 가리고선 파안대소하며 항의했다.
“으헉. 진짜 벗은 게요? 이거 촌보 중에서도 제일 센 촌보 아니오? 허허.”
“뭐…. 반칙은 무슨 반칙…. 속곳이 없으니 부끄럽지 않은걸…. 나만 계속 지니 이거 사키 아니오? 사키?”
“쿵”
취한 상태에서 거세게 항의하던 그가 비틀거리다 마작 패 속으로 쓰러졌다. 그 순간. 마치 짠 듯이 장 대인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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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된 것입니다요. 나리.”
“흠. 전날 밤에 명나라 사람과 도박을 하다 가산을 탕진…. 아니 그대 말로는 사기도박에 당했다. 이거지. 그리고 도박 빚을 탕감받으려고 우리에게 장사
하러 왔다?”
수문장이 그에게 자초지종을 조목조목 정리해 주었다. 여여문은 연신 굽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장군님. 제가 지금 가진 건 요. 요. 요. 세 치 혀와 그것 밖에 없읍죠.”
“흥. 핑계도 좀 그럴싸한 걸 대라. 내 놈은 적도들의 사주를 받은 염탐꾼이 분명하렷다. 조총수는 뭐하는가? 저놈을 조준하지 않고.”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총병들이 그에게 조총을 겨누었다. 여대장은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곡소리를 냈다.
“하이고. 살려주십시오. 나리. 사실 제가 가지고 온 수레를 다 팔면 큰 이문이 생긴다고 명나라 놈들이 그랬습죠. 그냥…. 그냥…. 나리에게 바치겠습니
다요. 저기 우마차를 끌고 온 명국 상인들하고 저를 안에만 집어 넣어주십시오. 안 그러면…. 저 죽습니다요.”
그가 곧 죽을 사람처럼 시늉하며 비굴한 거래를 제안하자 수문장은 구미가 당기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 고놈 참…. 그래. 가지고 온 게 무엇이냐? 금은보화라도 되느냐?”
여대장은 고개를 들고선 누런 이를 한껏 드러내고서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이고…. 황금보다 귀한 물건입죠. 보시면 마음이 달라지실 겁니다요. 헤헤”
“이놈이…. 지금. 나랑 농담 따먹기 하자는 것이냐?”
여여문이 실실거리며 수문장을 바라보자 그는 버럭 역정을 내었다. 왜장이 화를 내는 가운데에서도 여대장은 엎어지면서 몸에 묻은 흙을 툴툴 털어내며 천천히 일어서서 말했다.
“물입니다. 깨끗한 물. 당신들의 성에는 없는 명품 중의 명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