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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를 통해 본 프랑스 부역자 청산론
게시물ID : history_87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릴케
추천 : 13
조회수 : 295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5/04 21:15:04

알베르 카뮈(프랑스)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저서로는 [이방인][페스트]《최초의 인간》The First Man (Le premier homme) (집필중 사망하여 미완성, 1995)

《전락》The Fall (La Chute) (1956) 등 외에도 수많은 작품이 있습니다

 

그는 왜 나치부역자 청산에 동조하고 적극 주장했는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랑스는 1944년 8월 나치에서 해방된 후 곧 과거 청산에 들어가 약 2년 간에 걸쳐 조국을 배반하고 나치에 협력한 1만여 명의 부역자들을 처형했다.
프랑스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을 가혹하게 처벌했는가. 그것은 지난날의 부끄러운 과거를 바로잡지 않으면 국가 정체성을 확립할 수 없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수 없으며, 올바른 미래를 건설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프랑스에서도 과거청산문제를 놓고, 특히 나치에 부역한 지식인들의 숙청 문제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는 것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 2월까지 약 반년에 걸쳐 작가 프랑수아 모리악과 카뮈가 벌인 치열한 논쟁이다.
전형적인 가톨릭 신자이며 부르주아 작가이자 언론인이었던 모리악은 저항운동을 펼친 지하신문 `프랑스 문예"에 카뮈, 사르트르, 아라공 등과 함께 참여했음에도, 프랑스 전통 우익을 대변하는 `르 피가로"지의 논설을 통해 숙청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국민화합을 위해 그리스도의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카뮈는 해방을 맞을 때까지 지하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어온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하신문이었던 `투쟁"지를 통해 모리악의 이러한 자비론을 강력히 비판하며 응수했다.
"나는 증오에 대해 조금의 애착도 없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반역자를 사랑할 줄 아는 모리악을 존경하지만, 시민으로서의 나는 모리악을 불쌍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랑은 우리에게 반역자와 졸개들의 나라를, 우리가 원하지 않는 사회를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나는 분명하게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정의를 좌절시키는 자비를 거절할 것이다." 프랑스의 보수적 지식인들이 숙청에 반대한 데는 기독교인들의 자비론이나 국민들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말고도 지식인들이 특히 가혹하게 처벌당하고 있는데 대한 동정과 저항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경제인 등 다른 분야의 부역자들보다 문인이나 언론인, 출판인 등 지식인들이 더 엄중하게 처벌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가혹하리 만큼 지식인들을 중벌로 다스린 것은 지식인들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 컸고, 부역행위가 인쇄물로 고스란히 남아 있어 증거확보가 수월한 등 무엇보다 기소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식인에게 더 많은 책임을 묻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 지식인 사회나 일반 국민의 지배적인 여론도 한몫 했다. 지식인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생각과 신념을 퍼뜨리고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식인의 역사적 범죄에 대한 처벌은 지식인들에게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며, 글쓰기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정의를 주장하지 못할 망정 자기 신념에 반하는 글을 쓰도록 압력을 받았을 때 지식인이 지켜야 할 마지막 양심은 `침묵"이라는 것도 알게 해주었다.
사르트르는 이를 두고 "작가는 그가 무엇을 하든 `현장"에 있고, 심지어 첩첩 산중에 들어가 있다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으며,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작가는 누구든지 자기 시대의 `장터"에 참여해 있다. 심지어 작가의 침묵조차도 하나의 입장표명이고 정치행위이며, 지식인으로서의 참여의 표시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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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8월 25일 파리가 해방되자 프랑스는 나치 괴뢰 정권인 비시 정부의 이념에 동조하고 대독 협력에 앞장선 인사들에 대한 숙청 작업을 단행했다. 모든 분야를 망라한 숙청 작업에서 특히 여론의 관심을 끈 것은 언론인과 문인이었다. 나치 강점기에 친독 성향 신문·잡지에 기고한 언론인, 나치와 비시 정부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한 문인들이 표적이었다.
부역 지식인의 처벌 수위를 놓고 프랑스 지식계는 치열한 논쟁으로 끓어올랐다. 작가인 프랑수아 모리아크의 ‘관용론’과 알베르 카뮈의 ‘청산론’ 간 격돌이 대표적이었다. 모리아크는 청산론이 프랑스 국민을 ‘저항운동가’와 ‘부역자’로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지적하고, 정치적 차원을 벗어난 기독교적 사랑과 자비에 호소했다. 반면 카뮈는 “청산 작업에 실패한 나라는 결국 스스로의 쇄신에 실패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는 유명한 문장으로 청산론의 중심에 섰다. 당연히 카뮈의 주장이 힘을 얻었다.
언론인과 문인이 맨 먼저 도마에 오른 것은 재판부의 의도적 전략이기도 했다. 이 범주의 부역자들은 가장 잘 알려져 있었고, 부역행위의 증거가 가장 명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비시 정부 주역들이 이미 국외로 도망쳐버려 당장 이들을 처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선 잘 알려진 협력자들부터 처벌하면 숙청 지연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진정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게다가 이들의 글은 확실한 물증으로 남아 있어서 신속하게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파리의 부역자재판소에서 재판 받은 작가·언론인 32명 중 무려 12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중 7명이 처형되었다. 처형된 7명 중 가장 큰 논란이 된 인물은 로베르 브라지약(1909~1945)이었다. 1945년 1월 19일 재판 받을 당시 브라지약은 36세로, 프랑스의 대표적 반유대주의 파시스트 지식인이었다. 이 젊은 작가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아까워한 문화계 인사들은 사면 탄원서를 드골 장군에게 보냈다. 탄원 서명자 59명 중에는 ‘철저한 정의’를 외쳤던 카뮈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는 거부되고 결국 2월 6일 브라지약은 총살되었다.
“왜 돈으로 부역한 기업가들보다 말과 글로 부역한 자들이 더 큰 벌을 받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작가 베르코르는 단호하게 답했다. “기업가를 작가와 비교하는 것은 카인을 악마와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카인의 죄악은 아벨로 그치지만 악마의 위험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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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과거의 불행은 반역을 처벌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오늘 또 다시 처벌하지 않는다면, 주모자들을 처단하지 못한다면, 커다란 위험이 닥칠 것이다. 어제의 죄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곧 내일의 죄를 부추기는 것이다." 과거사 문제에서 프랑스는 우리나라의 거울이다. 프랑스는 나치 점령의 부역자들을 거의 완벽하게 숙청했으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에필로그

본인 또한 무차별적인 처단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다만 최소한의 양심과 반성을 바랄뿐이다

죄를 지었더라도 참회한다면 얼마든지 그들을 용서하고 받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까뮈의 부르짖음이 아직도 내 뇌리에 각인 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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