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략적인 개요
1) 분구
• 직경 약 34m, 높이 약 6m 규모의 원형 고분으로서 전남 남해안지역 최대급임
• 구릉 정상부에 성토하여 조성하고 주변은 편평하게 정지하였다고 추정됨
2) 주구는 확인되지 않았음
3) 석실(석곽)
• 길이 320cm, 너비 150(동)-130(서)cm, 깊이 130cm 규모의 사다리꼴 석곽임
• 분구 성토 과정에서 정상부에 동서 방향으로 축조하였음
• 먼저 서벽과 북벽을 함께 축조하고 나중에 동벽과 남벽을 함께 축조하였음
• 벽은 가공한 판석을 벽돌 쌓듯이 축조하였음
• 천정은 3매의 판석을 이용하였음
• 석곽 주변에는 여러겹의 할석을 놓아 보강하였으나 벽면이 휘었음
4) 출토유물
• 금동관 : 뒤쪽에 반구형 장식이 달린 것으로서 전체적인 형태는 익산 입점리 출토품과 흡사하나 문양이 투조문이어서 입점리의 타출문과 다르고 서산 부장리 출토품과 상통함
• 금동신발 : 잔존 상태가 좋지 않아 현장에서의 전모 확인은 보류해 두었는데 바닥의 T자형 투조문은 원주 법천리 1, 4호분 출토품과 상통함
• 구리거울(連弧紋鏡) : 직경 10.5㎝ 크기로서 중앙에 있는 원형 뉴를 박쥐형 四葉鈕座가 감싸고 있고 그 사이에 4자의 명문이 있음. 뉴좌 외곽 으로는 안쪽을 향하는 팔연호문이 있으며 그 사이에도 8자의 명문 이 있음. 중앙부 4자 명문은 ‘長宜子孫’으로 추정됨
• 환두도 3점, 철모 2점, 금귀고리 1쌍, 갑옷, 투구, 철부, 방추차 등
• 유리소옥, 철촉 일괄
(고흥 안동고분 시굴조사 회의자료(전남대박물관, 2006))
2. 무덤 주인의 성격
제지세력설과 왜인설로 나뉜다.
"제지 해상세력설의 문제점이라면, 누세대적인 고분군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고흥 길두리 인근에는 다른 고총고분이 없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고흥 해창만 세력이 낙랑*대방군이 주도하던 시기부터 백제가 주도하던 단계까지 변함없이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면, 해창만 일대에 3,4세기부터 5세기대까지 지속적인 고분의 조영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지만 그렇지를 못하다. 향후 조사성과가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5세기대만 하더라도 안동고분 이외에는 이렇다 할 다른 고분의 양상을 알 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입지적으로도 안동고분은 고흥반도의 재지적인 세력이라는 측면보다는 남해안에 자리한 다른 왜계 고분과 관련성이 두드러진다."(김태식)
"왜계 고분 피장자의 출자에 대해서 우선 고려해야 할 것은 분형과 매장주체시설은 상당히 보수성을 지니고 있는데, 왜계 고분에 피장된 피장자 또는 집단은 그가 태어난 집단 구성원들이 축조한 분묘형식을 따른다는 점이다. 이와 연계해서 재지인이 새로운 분묘형식을 수용하였다면, 수용된 분묘형식은 특정인 또는 특정 지역에서 점차 주변지역, 그리고 보다 넓은 사회 구성원들이 수용하여 보편적인 분묘로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왜계 고분은 일정 지역에 1기씩, 그리고 1회에 한하여 그치고, 곧 소멸되는 문화 수용의 보편성에서 보았을 때 아주 예외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왜계 고분의 피장자는 왜인으로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홍보식)
"안동고분은 묘제뿐만 아니라 출토유물에 있어서도 왜계 요소가 많이 보이고 있다. 출토유물 가운데 무기와 무구류의 대부분이 왜와 관련되는 것으로 파악되며, 묘제이 있어서도 사다리꼴의 석곽 평면형태, 석곽 내부의 주칠, 석곽 상부 주변의 적석시설 등의 왜계 요소가 확인된다."(김태식)
"금동관, 금동신발 등의 출토 유물로 보아 고분의 연대는 5세기 초반대로 추 정되며 당시 고흥반도 일대에 대규모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암시한다."(임영진, 오동선)
하지만, 안동고분의 주인이 백제와 무관하진 않다. 왜냐하면 백제계 위신재가 부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흥반도에는 대가야 관련 유물이나 고분이 아직까지 확인되고 있지 않아 임나4현으로 추정되는 여수 순천 광양 세력과는 별개의 집단으로 보이기에, 5세기 후반에 백제의 간접적인 영향력이 미칠 수 있었던 지역이다.
그리고 "백제의 마한지역 진출은 평면적이고 전방위적인 것이 아니라 해안을 통하여 교두보를 설치하고 거점을 확보한 이후에 점차 내륙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한다".(성정용, 김용심)고 한다면 백제가 해안가까지 세력을 미치게 된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당시 왜와 적대관계였던 신라쪽에는 이러한 왜계 고분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피장자가 백제와 무관하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