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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달
보름달 보면 맘 금세 둥그러지고
그믐달에 상담하면 움푹 비워진다
달은
마음의 숫돌
모난 맘
환하고 서럽게 다스려주는
달
그림자 내가 만난
서정성이 가장 짙은 거울
안도현, 북항(北港)
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
나는 물메기와 낙지와 전어를 좋아한다 하였는데
너는 폭설과 소주와 수평선을 좋아한다 하였다
나는 부캉, 이라 말했는데 너는 부강, 이라 발음했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한자로 적어본다, 북항(北港), 처음에 나는 왠지 북(北)이라는
글자에 끌렸다 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든지 쾌히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맹서를 저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배신하기 좋은 북항
불 꺼진 삼십 촉 알전구처럼 어두운 북항
포구에 어선과 여객선을 골고루 슬어놓은 북항
탕아의 눈 밑의 그늘 같은 북항
겨울이 파도에 입을 대면 칼날처럼 얼음이
해변의 허리에 백여 빛날 것 같아서
북항, 하면 아직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이
있을 것 같아서 나를 버린 것은 너였으나
내가 울기 전에 나를 위해 뱃고동이 대신 울어준
북항, 나는 서러워져서 그리운 곳을 북항이라
하였는데 너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하였다
김소월, 먼 후일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이성부, 귀가 밝아진다
길가로 열린 내 창에는
세상의 온갖 크고 작은 소리들이 자주 넘나든다
그 가운데에서도 조용하게 가만가만 들리는 소리들 예컨대
땡감나무 이파리들 살랑거리는 사이로
하늘과 햇살이 간신히 틈 비집어 들어오는 소리 들리고
한낮의 고요 속으로는
시간이 흐르다가 무담시 멈칫거리는 소리 들리고
땅거미 드리워지는 소리 들리고
놀이터에서 온종일 혼자 놀던 이웃집 아이 잠들어
키 크는 소리 들리고
밤이면 가등 불빛에 힘없니 귀가하는 가장들의 긴 그림자도
따라 한숨 쉬는 소리 들리고
산에 두고 온 내 발자국 지워지는 소리 들리고
높은 집들에 가린 내 창은
갈수록 눈 어두워지고 귀만 밝아진다
이근화, 국수
마지막 식사로는 국수가 좋다
영혼이라는 말을 반찬 삼을 수 있어 좋다
퉁퉁 부은 눈두덩 부르튼 입술
마른 손바닥으로 훔치며
젓가락을 고쳐 잡으며
국수 가락을 건져 올린다
국수는 뜨겁고 시원하다
바닥에 조금 흘리면
지나가던 개가 먹고
발 없는 비둘기가 먹고
국수가 좋다
빙빙 돌려가며 먹는다
마른 길 축축한 길 부드러운 길
국수를 고백한다
길 위에 자동차 꿈쩍도 하지 않고
길 위에 몇몇이 서로의 멱살을 잡고
오렌지색 휘장이 커튼처럼 출렁인다
빗물을 튕기며 논다
알 수 없는 때 소나기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소주를 곁들일까
뜨거운 것을 뜨거운 대로
찬 것을 찬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