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흐, 들꽃에 숨겨진 히말라야
히말라야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베니아 칸막이 옆방에서 소근거리는 소리로
며칠째 밤잠을 설치고 일어나
키 낮은 산집 주인들과
구름 인사 나누고
바람과 함께 밤이슬 털고 있던
마당가 낮은 돌담 앞에서
발걸음 막 옮기려 할 때 알 수 없는
미소가 한순간 언뜻
내 콧등을 스쳐지나갔다
그 엷은 바람의 기미, 그때 알아채지는
못하였으나 십 년 너머 지나
우연히 꺼내 본
그날 사진에
높고 신성한 산의
가장 아름다운 미소가 살랑거리고 있었다
돌담 사이 홀로 핀 꽃에 숨겨진
산의 미소, 콧등을 건드리는 꽃잎처럼 다가와
환하게 햇살 퍼트리며
이슬도 채 말리지 못하고 가는 사람에게
설산의 정상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재숙, 티눈
생애의 가장 허술한 빈틈을 뚫고 들어와
내 발바닥에 뿌리를 내렸다. 보란 듯이
보란 듯이 아프다, 살 속을 파고드는 집요함
그래 사랑, 너는 내 심장에 박힌 티눈이다
이동재, 빗살무늬토기
자기 인생에 처음으로
빗금을 칠 줄 알았던 사람
밋밋한 세상에
수없이 빗금을 그어댄 그 사람
자기 밥그릇에 빗금을 치며
웃었을 그 사람
쓸쓸한 그 사람
나해철, 담쟁이
살았을 뿐이다
살아내야 할 시간을
견디며
빈자리에
푸른 잎을 토해냈을 뿐이다
다만
절체절명
사는 일을 위하여
살아냈을 뿐이다
오늘 너는
흰 절벽을 푸르게 덮었다고 하는구나
시간들이
직벽으로 서 있었는가
절벽에서 살아왔는가
절체절명
이 시간
살이 터지며 또 푸른 것
하나 토하자꾸나
한용운, 사랑하는 까닭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