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 어느 목수의 집 짓는 이야기
기적처럼 바다 가까운 데 있는 집을 생각하며 살았다
순서가 없는 일이었다
집터가 없을 때에 내 주머니에 있는 집
설계도를 본 사람 없어도
집 한 채가 통째로 뜨는 창은
미리 완성되어 수면에 반짝였다
나무 야생화 돌들을 먼저 심어
밤바다 소금별들과 무선 전화를 개통해 두고
허가 받지 않은 채 파도소리를 등기했다
하루는 곰곰이 생각하다
출입문 낼 허공 옆 수국 심을 허공에게
지분을 떼 주었다
제 안의 어둠에 바짝 붙은 길고 긴 해안선을 타고
다음 항구까지 갈 수 있는 집의 도면이 고립에게서 나왔기에
섬들을 다치지 않게 거실 안으로 들이는 공법은
외로움에게서 배웠다
물 위로 밤이 오가는 시간 내내
지면에 닿지 않고 서성이는 물새들과
파도의 도서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개가식으로 정렬된 푸르고 흰 책등이
마을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바다 코앞이지만 바다의 일부를 살짝 가려둘 정도로
주인이 바다를 좋아하니
바다도 집을 좋아해 줄 수 있도록
자연으로 짓는 게 기본
순서를 생각하면 순서가 없고
준비해서 지으려면 준비가 없는
넓고 넓은 바닷가
현관문이 아직 먼데 신발을 벗고
맨발인 마음으로 들어가는 집
내 집터는 언제나 당신의 바닷가에 있었다
김명수, 검차원(檢車員)
칠흑같이 어두운 밤
화차들이 정거한 역구내 선로 사이로
늙은 검차원 하나
침착하게 날카로운 망치를 들고 차바퀴를 두드리며 지나간다
디젤엔진의 고동은 꿈처럼 울리고
검게 빛나는 석탄차의 석탄은
밤중의 고요를 지켜보는데
반짝거리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간데라 불빛 하나
유개차(有蓋車) 속에 숨죽인 쥐 한 마리
홀로 눈떠 인기척을 넘보고
차거운 금속성의 망치 소리가
탱―하고 차륜을 울려
대륙을 횡단하는 긴 철로로 멀어져갈 때
천 길 땅속에 잠자던 쇠붙이의 원음을
칠흑같이 어두운 밤
늙은 검차원 하나
낡아빠진 수차보(修車譜)에 적어 넣는다
문정희, 미로
어떤 그리움이
이토록 작고 아름다운 미로를 만들었을까요
별 하나가 겨우 지나가도록
별 같은 눈빛 하나가 지나가도록
어떤 외로움이
강물과 강물 사이 꿈 같은 다리를 얹어
발자국 구름처럼 흘ㄹ가도록
그 흔적 아무 데도 없이
맑은 별 유리처럼 스며들도록
가면 속 신비한 당신의 눈빛이
나만 살짝 찾을 수 있도록
어떤 사랑이
이토록 실핏줄처럼 살아 있는 골목을 만들었을까요
정호승, 밥그릇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신혜경, 대숲에도 길이 있다
저 마디가
저절로 생긴 건 아닐 거야
속으로 삼킨 울음 켜켜이 쌓인 흔적
관절염, 골다공증 앓고 있는 생(生)이여
휘어지느니 차라리
허리 꺾고 싶던 숱한 날들
한겨울 댓잎처럼 푸르게 돋아난다
스스로 단단해지기란
긴 세월 참고 또 참는 일
눅눅한 생애, 내 것이라면 더 이상
텅 빈 속 채우려 안달하지 말자
바람이 부는 대로 술렁술렁 살다 보면
어느 길모퉁이에서
바람을 타고 노는 대꽃을 만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