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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자, 서부역
옛날에는 동쪽에서 그를 기다렸다
난해한 책을 끼고 그가 내려오던 계단을 향해 서있었다
지금은 세상 전부가 서부
없어진 방향이 그리웠다
사랑의 절반은 반대 방향에서 기다리는 것
자작나무 숲길을 끝까지 걸어가도 못 만나는 것
피고도 남은 꽃 위 바람 어디쯤
한 번도 태우지 못한 생풀 타는 연기 오른다
매워서 잡지도 놓지도 못하고
눈물로 쓰라렸던 얼굴
지금은 서부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고정희, 객지
어머님과 호박국이 그리운 날이면
버릇처럼 한 선배님을 찾아가곤 했었지
기름기 없고 푸석한 내 몰골이
그 집의 유리창에 어른대곤 했는데
예쁘지 못한 나는
이쁘게 단장된 그분의 방에 앉아
거실과 부엌과 이층과 대문 쪽으로
분주하게 오가는 그분의 옆얼굴을 훔쳐보거나
가끔 복도에 낭낭하게 울리는
그 가족들의 윤기 흐르는 웃음소리
유독 굳건한 혈연으로 뭉쳐진 듯한
그 가족들의 아름다움에 밀려
초라하게 풀이 죽곤 했는데
그분이 배려해 준
영양분 가득한 밥상을 대하면서
속으로 가만가만 젖곤 했는데
파출부도 돌아간 후에
그 집의 대문을 쾅, 닫고 언덕으로 내려올 땐
이유없이 쏟아지던 눈물
혼자서 건너는 융융한 삼십대
이승하,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오죽했으면 죽음을 원했으랴
네 피고름 흘러내린 자리에서
꽃들 연이어 피어난다
네 가족 피눈물 흘러내린 자리에서
꽃들 진한 향기를 퍼뜨린다
조금만 더 아프면 오늘이 간단 말인가
조금만 더 참으면 내일이 온단 말인가
그 자리에서 네가 아픔 참고 있었기에
산 것들 저렇듯 낱낱이
진저리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을
장석남, 옥수수밭의 살림
옥수수밭에 와 살고부터
나는 지금 옥수수밭에 살고 있구나 생각했다
옥수수밭의 수런거림과 두근거리는 살림을 살피고부터
나도 저 옥수수밭의 살림이구나 생각했다
폭풍우가 검은 스크럼으로 덮치는 여름밤
조용히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그리고
사랑이 없던 때도 생각했다
이 옥수수밭을 떠나 살고부터
이 옥수수밭을 생각할 것이다
그때는 옥수수밭 사이로 반딧불이들도 날을 것이다
허밍처럼 눈시울 속을 날을 것이다
김나영, 이사
이 남자다 싶어서
나 이 남자 안에 깃들어 살
방 한 칸만 있으면 됐지 싶어서
당신 안에 아내 되어 살았는데
이십 년 전 나는
당신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나 당신 밖에 있네
옛 맹세는 헌 런닝구처럼 바래어져 가고
사랑도 맹세도 뱀허물처럼 쏙 빠져나간 자리
25평도 아니야
32평도 아니야
사네
못 사네
내 마음의 공허가
하루에도 수십 번 이삿짐을 쌌다 풀었다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