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일 09.09.30
읽은날 14.09.11
487쪽.
13p.
요노스케는 일단 바닥에 앉았다. 먼지 때문에 까슬까슬했다. 가방에 걸레가 들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 어머니가 반강제로 가방에 넣어준 것이었다. 아들에게 새로운 생활은 희망이지만, 어머니에게 새로운 생활은 걸레였던 모양이다.
...
맨션에서 나와 길 맞은편에 있는 공중전화박스로 들어갔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아버지였다. 전화를 받자마자 "이불은 도착했니?"라는 말부터 물었다.
어머니가 걸레라면, 아버지는 '새로운 생활 = 이불'인 모양이다.
143p.
솔직히 가토의 요리 실력은 형편없었다. 그날 볶음밥도 그렇고 얼마 전에 만든 야채볶음도 무슨 까닭인지 하수구 냄새가 났다. 제아무리 둔한 요노스케도 불만을 털어놓자, "난 식욕은 질색이거든"이라며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그 왜, 인간의 다섯 가지 욕망이란 게 있잖아. 성욕, 재물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 그중에서 제일 질색인 게 식욕이야."
"'난 피망이 질색이야'라는 말은 들어본 적 있지만, 식욕이 질색이라는 놈은 처음이다."
야채볶음 간 맞추는 얘기일 뿐인데 왜 그런지 가토를 상대로 얘기하다 보면 선방의 선문답처럼 변해버렸다.
160p.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때 사쿠라의 마음을 움직였던 말은 "계속 좋아했어"라는 첫 고백이 아니라 "취한 척하는 건 취하지 않았을 때 오사키를 훨씬 더 좋아하기 때문이야"라는 알 듯하면서도 알 수 없는 요노스케의 아리송한 설명 쪽이었던 것 같다.
그날 밤 사쿠라에게 어떤 대답을 들었는지 요노스케는 확실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그러나 사쿠라의 배웅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나에겐 여자친구가 있다" "어? 나한테 여자친구가 있나?" 라고 몇 번씩이나 혼잣말을 중얼거렸으니 아마도 호의적인 대답이었을 것이다. 전신주가 나올 때마다 높이 뛰어올랐떤 기억만은 생생하다.
189p.
문을 닫으려던 아버지가 우뚝 멈춰 서더니 "너 혹시…… 저 애한테 이상한 짓 한 건 아니겠지?" 라며 돌아보았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이상한 짓이라니?" 라며 요노스케가 하품을 했다.
"으음, 예를 들자면…… 임신을 시켰다거나."
"네에?"
진심으로 물었던 모양이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냥 친구예요."
"정말이냐?"
"정말이에요."
요노스케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실제로 뒤가 켕길 만한 짓은 전혀 한 적이 없었다.
안심한 듯한 아버지가 문을 닫더니 "여보! 요노스케 살 안 쪘다네"라며 아마도 부부끼리의 암호인 것 같은 보고를 하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269p.
"우리가 사귈 때도 돈이 조금만 있었으면 이렇게 여러 군데 놀러 다닐 수 있었을 텐데."
바람에 띄엄띄엄 끊어지는 소리로 요노스케가 말했다.
"웃기네. 틈만 나면 침대에 밀어뜨린 주제에. ……그리고 돈이 없기 때문에 즐거운 시기라는 것도 있을 거야."
351p.
"미안해요. 늘 저러세요. 내가 사귀는 사람은 곧 장래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라."
쇼코가 노고를 치하해주었지만, 그 치하가 또다시 부담스러웠다.
"저어, 실은 둘이 있을 때 진지하게 얘기해볼 생각이었는데, 우리 사귀는…… 거지?"
요노스케의 질문에 쇼코가 심상치 않을 정도로 수줍음을 타기 시작했다. 로코코풍 커튼에 자기 몸을 돌돌 말기 시작했다.
"쇼, 쇼코?"
"……요노스케 씨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데요?"
"나? 나야……."
요노스케는 거기서 말문이 막혔다. 사쿠라와 사귀기 시작했을 때 감정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그러나 쇼코랑 있으면 늘 허둥거리긴 하지만 나중에 떠올리면 즐거웠다.
"나야 쇼코를 좋아하지만" 이라고 요노스케가 말했다.
"저도요"라고 쇼코가 대답했다.
"그럼, 사귀는 걸로……."
"……괜찮지 않을까요?"
커튼으로 몸을 휘감으며 사랑 고백을 한 후, 무슨 까닭인지 쇼코는 자기 혼자만 자기 방에 틀어박혀버렸다.
361p.
고향 집 거실 고타쓰 속에 드러누운 요노스케는 지칠 줄도 모르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서 빈둥거리기만 하는 전형적인 새해 연휴였다. 베개로 벤 방석이 아직 새것이라 머리를 누이면 봉긋이 솟아올랐다. 그것 때문에 텔레비전 보기가 힘들었다. 머리만 조금 앞으로 내밀면 될 텐데, 그게 귀찮아서 아까부터 몇 번씩이나 방석 모서리만 내리눌렀다. 누르자마자 푹신푹신한 방석은 또다시 부풀어 올랐다. 부풀어 오르면 방석 모서리에 달린 말 꼬리 같은 장식이 텔레비전을 보는 요노스케를 방해했다.
399p.
"요노스케? 너 잘 지내냐?"
"그럼, 물론 잘 지내지. 저어, 갑작스러운 말이긴 할 텐데 너 혹시 고양이 안 키울래?"
"안 키워."
"달리 받아줄 사람이 없어서 그래. 지금 요 녀석을 받아주면 포르노 비디오까지 붙어갈 텐데."
이시다 얘기가 떠올라서 순간적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가토가 별로 흥미 없어 하는 게 금방 느껴졌다.
"최대한 남자가 많이 나오는 걸로 줄게."
483p.
아직도 사고를 자주 떠올립니다. 어쩌자고 그 애는 돕지도 못할 상황이었을 텐데 선로로 뛰어들었을까.
그렇지만 요즘에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 애는 틀림없이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을 거다. '틀렸어, 구할 수 없어'가 아니라, 그 순간 '괜찮아, 구할 수 있어'라고 믿었을 거다. 그리고 이 아줌마는 그렇게 믿었던 요노스케가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