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호, 민들레
민들레가 핀다
아이들이 부는 팽팽한 풍선처럼
마음 졸이던 그런 봄날에
눈물 같은 풀꽃 데리고
소리, 소문 없이 그렇게 온다
아무도 보아주는 이 없어도
고샅길을 지나
우리네 뒤뜰까지 왔다가
그렇게 간다
우리네 그리움도
거두어간다
김소운, 흐르지 않는 것은 없다
눈을 드니
흘러가는 풍경 속에
언뜻 스치는 어머니
가슴 엔다
우리 짧은 사랑이나
더 긴 미움의 인연
가끔은 머물러
소설도 썼지만
돌아보니 그냥 물길이었네
흘러 흘러서
나 이제 저문 노을빛 부셔 하며
이름 석 자 물 위에 올린다
희미하다
서정춘, 달팽이 약전(略傳)
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 들쳐 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인 젖은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 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생(生)이 있었다
나해철, 수중릉에서
살면서 흘려버렸던 시간들을
덮고서 나는 누웠다
회한과 수고도 사라져
맑은 물이 된 과거 너머로
네 얼굴이 푸르구나
누굴 위해 살았던 것이 아니었었지
이제야
너를 위해 나머지 영원한 시간을 바친다
물이랑 일렁이면
나의 심장이 너를 위해 박동하고
있음을 알라
파도가 희게 부서지면
나의 영혼이 너를 위해 울고
있음을 알라
네 밤과 낮의
가장자리 모든 물가에
내 숨소리 철썩이고 있으리니
나에게 오라
네가 어떤 절정에 서 있을 때라도
유안진, 상처가 더 꽃이다
어린 매화나무는 꽃 피느라 한창이고
4백년 고목은 꽃 지느라 한창인데
구경꾼들 고목에 더 몰려 섰다
둥치도 가지도 꺾이고 구부러지고 휘어졌다
갈라지고 뒤틀리고 터지고 또 튀어나왔다
진물은 얼마나 오래 고여 흐르다가 말라붙었는지
주먹만큼 굵다란 혹이며 패인 구멍들이 험상궂다
거무죽죽한 혹도 구멍도 모양 굵기 깊이 빛깔이 다 다르다
새 진물이 번지는가 개미들 바삐 오르내려도
의연하고 의젓하다
사군자 중 으뜸답다
꽃구경이 아니라 상처 구경이다
상처 깊은 이들에게는 훈장(勳章)으로 보이는가
상처 도지는 이들에게는 부적(符籍)으로 보이는가
백년 못 된 사람이 매화 사백년의 상처를 헤아리랴마는
감탄하고 쓸어보고 어루만지기도 한다
만졌던 손에서 향기까지도 맡아본다
진동하겠지 상처의 향기
상처야말로 더 꽃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