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하단에서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자 조금만 더 가면 된다
강물이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 밀고 따르고 그런다
돌아보아 참으로 아득한 길
멀리까지 왔구나
제 몸 하나 보전하기조차 어려웠단다
그래그래 이제는 그 몸마저 버릴 때야
강물이 이마를 모으고 속삭인다
낭떠러지에서 눈 딱 감고 뛰어내려
폭포가 되듯 뛰어내리면 돼
망설이지 마 이제는
짠물에 몸을 섞을 때야
더 큰 물이 될 때야
붉은 노을이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집 찾아가는 새들도 몇 마리 흘낏
바라다보았다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먼 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휙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생의 엔진을 모두 끄고
흔들리는 파도 따라 함께 흔들리며
뜨거운 햇살 뜨거운 바다 위에서
떠나간 고래를 다시 기다리는 일은
그 긴 골목길 마지막 외등
한 발자국 물러난 캄캄한 어둠속에 서서
너를 기다렸던 일
그때 나는 얼마나 너를 열망했던가
온몸이 귀가 되어 너의 구둣발소리 기다렸듯
팽팽한 수평선 걸어 내게로 돌아올
그 소리 다시 기다리는 일인지 모른다
오늘도 고래는 돌아오지 않았다
바다에서부터 푸른 어둠이 내리고
떠나온 점 등 인의 별로 돌아가며
이제 떠나간 것은 기다리지 않기로 한다
지금 고래가 배의 꼬리를 따라올지라도
내가 울면 내 이름 부르며 따라올지라도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겠다
사람의 서러운 사랑 바다로 가
한 마리 고래가 되었기에
고래는 기다리는 사람의 사랑 아니라
놓아주어야 하는 바다의 사랑이기에
김사인, 나비
오는 나비이네
그 등에 무엇일까
몰라 빈 집 마당켠
기운 한낮의 외로운 그늘 한 뼘일까
아기만 혼자 남아
먹다 흘린 밥알과 김치국물
비어져나오는 울음일까
나오다 턱에 앞자락에 더께지는
땟국물 같은 울음일까
돌보는 이 없는 대낮을 지고 눈시린 적막 하나 지고
가는데, 대체
어디까지나 가나 나비
그 앞에 고요히
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김민서, 피어라 안개
밤마다 뒤척이는
잠의 머리맡에 그대 있어
두물머리에 섰다
남과 북
갈래를 버리고
하나 된 강에 하얗게
물안개 핀다
피어라 안개
뭍과 물
산과 강
경계를 지우고
남과 여
너와 나
분별도 버리고 피어라
피어라 안개
아무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이기도 한
안개의 다른 이름은 스밈
안개가 겹으로 겹으로 피었다
그대에게 스밀 때다
안개에 젖어
안개에 스며
그리하여
그대의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기까지
피어라 피어라 안개
문태준, 오랫동안 깊이 생각함
이제는 아주 작은 바람만을 남겨둘 것
흐르는 물에 징검돌을 놓고 건너올 사람을 기다릴 것
여름 자두를 따서 돌아오다 늦게 돌아오는 새를 기다릴 것
꽉 끼고 있던 깍지를 풀 것
너의 가는 팔목에 꽃팔찌의 시간을 채워줄 것
구름수레에 실려가듯 계절을 갈 것
저 풀밭의 여치에게도 눈물을 보태는 일이 없을 것
누구를 앞서겠다는 생각을 반절 접어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