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식, 배, 날다
날고 싶은 배가 있었다
도무지 돋아날 것 같지 않은 선체에서
신기하게도 날개가 조금씩 돋아나더니
홀연 배가 높이 난다
온몸의 깃털이 반짝반짝 빛나는 배
배가 노란 부리를 크게 벌리고
맑은 뱃고동 소리를 낸다
레이더의 반짝이는 빛속으로 들어가던 나는
문득 눈동자에 바짝 붙어 있는
새까만 벌레 하나를 본다
빛을 갉아 먹고 어둠을 토해 내고
이상한 벌레
배안에 어둠이 쌓이고 그 무게를 느낀
날개가 한 번 휘청하며 흔들린다
순간 날개 하나가 떨어져 나가고
방향을 잃은 배가 길게 목을 뺀다
나는 배에게로 달려가 캄캄한 눈동자에
환한 햇빛등을 달아 놓았다
문정, 봄비
어디에 묶어놓았던 밧줄인가
어디로 올라가던 밧줄인가
어느 높이쯤에서 끊어져 떨어지는가
아스라한가
견딜 만한 허공인가
누가 온다면 마중 나갈 만한 거리였던가
이번에는
무서움도 없이 난간도 없이 가지 끝으로 목련꽃을 피워놓고
두근거림도 부끄러움도 없이 그늘을 밀고 진달래꽃을
라일락꽃을 피워놓고
밧줄도 사라진 공중으로
두 눈 감고
기다랗게
만져질 향을 걸어놓고
잡고 올라가
선반 위에 곱게 모셔 둔 불생불멸의 경전 같은
사랑이 있다는 듯
꽃다발을 등에 지고 올라가
박경리, 옛날의 그 집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 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정호, 종지
남한강 상류 돌밭 한 켠에 엎디어진
조막손만한 스텐레스 종지 하나
얼마나 오랜 세월 강바닥 굴러다니며
모난 돌에 치이고 단단한 돌에 부딪쳤는가
밑바닥이며 둘레 가장자리 어디 빼꼼한 데라곤 없다
어떤 내력이 이 작은 종지를 예까지 끌고 왔을까
오래 묵힌 짠 생각으로 식솔들 입맛 맞추다가
지아비 제사엔 청주잔으로도 쓰였을까
생각지도 않은 물난리 된통 만나
평창 연당 영월 단단한 돌들과 부대끼며
수없이 찍히고 부딪쳐가며
여기 영춘 오사리 돌밭까지 와서
하릴없이 망신창이 지친 몸 쉬고 있는가
그 주근깨투성이를 가만히 집어 올리는데
오오 놀라워라, 종지 안쪽은
흠 하나 없이 말짱하다
거울면처럼 반들반들하다
고뇌를 안으로 안으로 보듬으면
저리도 환한 속을 간직할 수 있을까
저 시린 시간의 물살에
나부대며 흠집만 더께더께 늘어나는
내 마음 속 종지 하나
황학주, 신문이 왔다
신문이 왔다
무엇을 보든 바깥을
1년만 구독해달라고 했으나
어제 온 신문이 접힌 채
거실 바닥에 놓여 있다
어제는 이미 그제와 같이 내다보지 못하였으니
문(門)을 받아보지 못한지도 어느덧 오래되었다
백년 후에도 우리의 바깥은 뉴스 수준일까
지금 내 안에 있는 당신 같은 얼굴을
꼭 한 사람 본 것은
내 꿈 바깥까지 만나러오는 단순(單純)이 당신 하나이기 때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신문 같은 게
없는 세상이 바로 내 마음이다
그러니 눈 감고 보라
멀다 해도 우리의 바깥은 안에 있을 것이다
당신이 내 안에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