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일 11.03.23
읽은날 14.09.10
203쪽.
47p.
곤은 자신이 언제부터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왔는지를 떠올리지 않았다. 비좁은 세상을 포화 상태로 채우는 수많은 일들을 꼭 당일 속보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 없고 속도를 내면화하여 자기가 곧 속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아다지오와 같은 삶. 그 어떤 행동도 현재를 투영하거나 미래를 전망하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과거가 반성의 대상이 되지 않으니 어느 순간에도 속하지 않는 삶이었다.
모두 어제가 되어 부질없어진 인물과 사건의 나열들. 그는 과거를 명시하는 글자들을 단지 할 일이 없어 무료함으로 죽지 않기 위해서만 내려다보았다. 그가 어제의 세계를 읽는 동안 실제 세계는 변화와 요동과 전복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고인 물이나 응결된 얼음만큼의 비중을 간직하며 급속 냉각되어 빙산에 갇힌 의식만을 유지하고 살아갈, 꼭 그만큼의 열량만 있으면 되는 나날들.
56p.
"골치 아픈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곤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고개를 기우뚱했다.
"순전히 대학생 아이들 술 처마시고 시끄럽게 난장 피우러 오는 데로, 이 밤중에 서른두 살 먹은 여자가 혼자서 왔다. 있는 대로 수척한 얼굴 해가지고는, 선발대라거나 뒤에 일행이 마저 올 거라든지 그런 얘기도 없이 혼자.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니?"
곤은 대답 대신 슈퍼 창문 너머 일찍이 내다보이는 강물에 정강이까지 담그고 허우적거리다 친구들과 한 덩어리가 되어 소리를 지르는 대학생들한테로 눈을 돌렸다.
"혼자 온 여자, 둘이 온 여자, 둘이 온 남녀. 이 셋 중에 어느 쪽이 강물에 몸을 던질 확률이 가장 높을 것 같냐. 지나친 생각일지 모르지만 주위에 취재할 만한 위락시설이나 맛집이라곤 쥐똥만큼도 없는 강가에 여자가 혼자 왔을 때는 이유가 잇게 마련이고, 대개는 좋지 않은 이유가 더 많지. 차라리 팔짱 끼고 온 남녀가, 비록 불륜 관계인 티가 훤히 나더라도 그 쪽이 덜 걱정된다. 수시로 살펴봐라. 그래 봤자 보통은 하룻밤 안에 결판이 나지만."
159p.
"날 죽이고 싶지 않아?"
그것은 강하가 원하면 그렇게 되어도 할 말 없다거나 상관없다는, 가진 거라곤 남들과 다른 몸밖에 없는 곤이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였다. 그때 라이터에 간신히 불꽃이 일어났다.
"……물론 죽이고 싶지."
작은 불꽃이 그대로 사그라지는 바람에 곤은 그 말을 하는 강하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곤한테 다시 후드를 씌운 뒤 조임줄을 당겨 머리에 단단히 밀착시키고 강하는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살아줬으면 좋겠다니! 곤은 지금껏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예쁘다'가 지금 이 말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폭포처럼 와락 깨달았다. 언제나 강하가 자신을 물고기 아닌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랐지만 지금의 말은 그것을 넘어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것만 같았다.
202p. 작가의 말
아무리 산란회유를 하는 물고기처럼 힘차게 몸을 솟구치려 해도, 이 세상에 혼자만의 힘으로 호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이에요. 누에고치처럼 틀어박혀 자신만의 잠사로 온몸을 감싼 채로는, 코가 뚫리고 건강한 폐를 가졌다 해서 숨 쉴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누구나 아가미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를 곁에 두고 살아야만 하며, 내 옆에는 다행히 그런 분들이 있다고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