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
번개친다, 끊어진 길 보인다
당신에게 곧장 이어진 길은 없다
그것이 하늘의 입장이라는 듯
번개 친다, 길들이 쏟아내는 눈물 보인다
나의 각도와 팔꿈치
당신의 기울기와 무릎
당신과 나의 장례를 생각하는 밤
번개 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프다
천둥 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아프다
번개 친 후 천둥소리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
하종오, 사월에서 오월로
봄의 번성을 위해 싹틔운 너는
나에게 개화하는 일을 물려주었다
아는 사람은 안다
이 세상 떠도는 마음들이
한 마리 나비 되어 앉을 곳 찾는데
인적만 남은 텅 빈 한길에서 내가
왜 부르르 부르르 낙화하여 몸 떨었는가
남도에서 꽃샘바람에 흔들리던 잎새에
보이지 않는 신음소리가 날 때마다
피같이 새붉은 꽃송이가 벙글어
우리는 인간의 크고 곧은 목소리를 들었다
갖가지 꽃들 함께 꽃가루 나눠 살려고
향기 내어 나비 떼 부르기도 했지만
너와 나는 씨앗을 맺지 못했다
이 봄을 아는 사람은 이 암유(暗喩)도 안다
여름의 눈부신 녹음을 위해
우리는 못다 핀 꽃술로 남아 있다
허형만, 끈
앞자리에 앉은 젊은 시인이
날더러 끈이란다
끈도 끈 나름일 터
썩은 동아줄 같은 끈은
끈이라 할 수 없을 터
정년은 벌써 저만치서 나에게
손짓하며 다가오고
소주 몇 잔에
지방대학 교수 낯바닥이 화끈거린다
별들이 수런거리던 밤도
속절없이 깊어가는데
그 많은 제자들 다 어디 있는 걸까
도르래 줄처럼 칭칭 감긴
내 생의 끈을
어느 누가 잡고 있는 걸까
그 끈이 과연
존재하긴 하는 걸까
끈이 빛이라면
한줌 따뜻한 햇살이라면
김유선, 무심한 물
오더니 떠나가신다
문 앞을 두드리던 빗줄기도 벼름벼름 강으로 흘러간다
꿈의 신발짝 하나도 강으로 흘러 잠수하고
속살대던 봄비도 그예는 강모래에 파묻힌다
열병 앓던 폭우도 천둥 번개 식식대던 숨소리도
언제부터인가 저 혼자 노니는 연잎 빗방울이다
안녕하신가, 안부도 아득한 어느 지점
섞여 아득한 저들
자울자울 흐르는 저녁 강물에 귀 기울이면
이 아픔, 저 상처 앓이 앓이 한 곡조가 되는데
버리면 가벼워지는가
무거운 기억은 강바닥 깊숙이 버리고
다시 흘러가는 저들
오면 가는 것을 강물을 보면 안다
오면서 떠나가신다
이상국, 휘영청이라는 말
휘영청이라는 말 참 좋다
어머니 세상 뜨고 집 나간 말
누구 제삿날이나 되어 깨끗하게 소제한 하늘에
어머니가 걸어놓은 휘영청
휘영청이라는 말
내가 촌구석이 싫다고 몰래 떠날 때
지붕 위에 걸터앉아
짐승처럼 내려다보던 그 달
어머니가 글을 몰라 어디다 적어놓지는 않았지만
휘영청이라는 말 여태 환하다
오늘도 누군가를 기다린다
고개를 숙이고 돌아오는데
마음의 타관객지를 지나 떠오르는 저 휘영청
말 한 마디 못하고 떠나보낸 계집애의 입속처럼
아직도 붉디붉은 달
휘영청이라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