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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G97vN2oiZG8
신경림, 소백산의 양떼
소백산자락의 목장에서 양떼를 모는 개는
이상하게도 영어만 알아듣는다
뒤로 가 하면 우두커니 섰다가도
고백 하면 재빨리 천여 마리 양떼 뒤로 가 서고
몰아라 하면 딴전을 피우지만 캄온 소리엔 들입다 몬다
미국서 훈련받은 개들이라 날쌔고 영악하기 사람 뺨쳐
양치기들은 종일 시시덕거리고 장난질이나 치며
몇 마디 영어로 명령만 하면 된다
모르고 있었을까 정말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까
영어만 알아듣는 개한테 쫓기는 것이
양떼만이 아니라는 걸
우리들 울부짖음에는 눈만 멀뚱거리다가도
캄온 하는 명령에는 기겁을 해서 양떼를 몰고
스톱 하고 호령하면 목숨을 걸고 세우는 것이
개만이 아니라는 걸
또 개를 영어로 부리며 시시덕거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양치기만이 아니라는 걸
마침내 영어만 알아듣는 개라야
두려워하게 된 것이 양떼만이 아니라는 걸
이시영, 저녁에
마른 나뭇잎 하나를 몸에서 내려놓고
이 가을 은행나무는 우주의 중심을 새로 잡느라고
아주 잠시 기우뚱거리다
전태련, 그래, 다시 봄
고목나무에 움이 트나
죽은 듯 마른 나무 등걸에
물오르는 소리 난다
메마르고 메말라
한 번 더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도
어여쁜 꽃망울 찾아왔으면
마음속으로 딱 한 번 뇌었는데
이런 기도엔 그처럼 귀 밝은 체하시는 하느님
스물스물 물기 고인다
한 번 만난 사람은 언젠가 꼭 다시 만난다는
귀기 서린 그 말 믿은 건 아닌데
느닷없이 놓여진 오작교
이 다리를 건너 너에게 가랴
그 다리를 건너 네가 오려는가
그래, 다시 한 번
봄
정호, 흔적
서암(西庵)스님이 열반에 들었다
스님, 사람들이 열반송을 물으면 어떻게 할까요
나는 그런 거 없다
정말 한평생 사시고 남기실 말씀이 없습니까
달리 할 말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냥 그렇게 살다 갔다고 해라
그리고는 홀연 입적했다 문경 봉암사 염화실(拈花室)에서
그 절명의 순간 절골 만삭인 진달래들
망울 터뜨리는 소리조차 죽였다
수행이 깊으면 저리도 깨끗한가
다비(茶毘) 때에도 사중(四衆)이 운집한 절 마당에
사리 한 과 남기지 않았다
부끄럽구나 내 이름자 위에
시 한 편 남기는 일
일평생 부질없는 일
박남철, 첫사랑
고등학교 다닐 때
버스 안에서 늘 새침하던
어떻게든 사귀고 싶었던
포항여고 그 계집애
어느 날 누이동생이
그저 철없는 표정으로
내 일기장 속에서도 늘 새침하던
계집애의 심각한 편지를
가져 왔다
그날 밤 달은 뜨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 정말 계집애가
교복 차림으로 검은 운동화로
작은 그림자를 밟고 여우처럼
꿈처럼 서 있었다 나를
허연 달빛 아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밤 얻어맞았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 빈터
그 빈터에서 정말 계집애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처음엔
눈만 동그랗게 뜨면서 나중엔
눈물도 안 흘리고 왜
때리느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달빛 아래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날 밤 달은 지고
그 또 다른 허연 분노가
면도칼로 책상 모서리를
나를 함부로 깎으면서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자꾸 책상 모서리를
눈물을 흘리며 책상 모서리를
깎아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