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삼국사기?
무슨 얘기인가. 우리 측 정사인 삼국사기를 꼼꼼히 살펴보던 기자의 눈에 밟히는 대목이 있다.
“(AD 8년) (온조)왕이 군사를 몰고, (마한의) 국읍을 병탄했고~1년 뒤 마침내 (마한은) 멸망했다.”(백제본기 온조왕조)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한이 이미 AD 9년 망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 역사학계가 이 삼국사기 기록을 믿지 않는 것이다.
“역사학계는 마한 멸망기록을 후대에 의도적으로 (온조왕대로) 소급해서 올려놓은 것으로 해석했지. 이 대목을 54국 마한 연맹체의 우두머리격인 목지국(目支國)의 멸망기록이라고 보는 거지. 잔존 마한세력은 백제의 핍박을 피해 점차 한반도 서남부로 내려갔다고….”(조 관장)
“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진서(晋書) 동이전 등 중국 측 기록 때문이죠. 특히 진서에는 277~290년까지 마한이 진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요.”(최 교수)
- 릴케님 글에서 인용했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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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님이 재미있는 화두를 던지셨네요. 요약하면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는 마한이 서기 8년에 멸망했는데
중국 기록에는 277-290 년까지 마한이 존재한 것으로 되어 있어서
중국 기록은 믿을 수 있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믿을 수 없어.. 이왕 이렇게 된거 으랏차차 김부식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전부다 구라로 설정하고 역사 연구 진행한다.. 뭐 이런 흐름인가요. 참으로 쪽발스러운 설정이라 아니할 수 없군요
보통은 이렇게 되면 중국 기록과 삼국사기중 둘 중에 어느 것이 거짓인가 고민해야 하지만 사대주의 사상이 발휘되었는지
당연히 김부식이 거짓말을 했을 것이라고 당연시 생각하는.. 뭐 그런 흐름인 것인지..
그런데
만일 이렇게 된다면 김부식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김부식은 서기 8년 백제 온조왕때에 마한이
멸망한 기록을 적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 이후에도 마한이 존재한 것을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분만 아니라 모순된 기록을 접하고 그것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기 때문이지요.
한번 자료를 봅니다.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기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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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0월, 임금이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병사를 내어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온조왕 27년(서기 9)27년(서기 9)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해서 그 백성을 한산(漢山)의 북쪽으로 옮기었다. 이것으로 마한이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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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온조왕에 마한이 멸망하였다고 (馬韓遂滅 )기록하였지만 동시에 이런 기록도 남깁니다. 삼국사기 태조왕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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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서기 122), 임금이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침입하였다. 부여왕이 병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
七十年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 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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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온조왕 마한멸망 기록만 적었다면 삼국사기 기록의 신뢰성은 의심이 갈만하지요 그런데 김부식 본인이 같은 책에 온조왕 마한 멸망 기록 이후에도 마한이 존재한 사료를 적었고 이것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조심스럽게 피력합니다.
이렇게 되면 온조왕 마한 멸망 기록을 바탕으로 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근거가 없게 됩니다. 김부식은 서기 8년 마한 멸망 기록과 122년 고구려와 마한의 연합 공격 기록을 남겨두었고 그것은 김부식이 양쪽다 신뢰할만한 사료라고 생각해서 적었겠지요.
그리고 이 모순되는 기록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남겼습니다.
이제 풍림화산의 의견을 적습니다. 김부식의 추정은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기록을 보면 마한 최후의 저항 세력을 한산 이북으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나오는데 아래의 기록을
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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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서기 19) 봄 3월, 달걀만한 우박이 떨어져 새들이 맞아 죽었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었는데, 6월이 되어서야 비가 왔다. 한수의 동북 마을에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구려로 도망가니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三十七年 春三月 雹大如雞子 鳥雀遇者死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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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 북쪽은 온조왕이 마한 잔존 세력을 강제 이주시킨 지역입니다. 마한 멸망 10년 후 이 지역 사람들이 고구려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동맹을 해서 요동을 침범하고 중국에 꾸준히 사절을 보내서 우리 마한 아직 멸망하지 않았어요 ~ 했던
마한 세력이 무엇인지 추측이 가능한 부분이죠. 최치원이 마한이 고구려가 되었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보통은 최치원이 뭘 몰라서
저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한반도 자료와 중국 자료를 골고루 섭렸했을 최치원은 마한 세력이 어떻게 고구려에 흡수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있습니다.
일제 시대 식민사학자들이 식민 사관을 만들 때에 가장 곤란한 부분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었을 것입니다.
본인들 정사인 일본서기 고사기는 초기 기록을 꼼꼼히 검토해 보니까 이게 아무리 봐도 허무 맹랑한 이야기이고
삼국사기 기록은 그렇지는 않았지요. 그래서 삼국사기 기록을 부정하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지상최대의 과제였을 것입니다
일본풍 실증사학.. 실증적인 자료를 원하는 목적에 따라 취사선택한다는 방식에 따라 삼국사기 온조왕 마한 멸망기록은
선택하고 같은 사람이 쓴 같은 책에 있는 고구려 태조왕 마한 고구려 연합 요동 기록은 과감히 보고도 못본척 했겠지요
이들에게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이렇게 자랑스런 일본풍 실증사학 혹은 식민사관은 온조왕이 한반도에서 마한을 멸망시켰다는 기록을
한큐에 구라로 만들어버렸으며
이병도인가 하는 친구는 이들의 시다바리를 열심히 하셨으며..
그리고 이 자랑스런 학풍은 오늘날에도 남아있어 일인 학자들은 지금도 삼국사기 초기 기록 못믿어.. 이질알들을 하고 계신
것이고..
한국 역사 학계는 릴케님이 올리신 대로 저런 상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