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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소나기
여름비가 사납게 마당을 후려치고 있다
명아주 잎사귀에서 굴러떨어진 달팽이 한 마리가
전신에 서늘한 정신이 들 때까지
그것을 통뼈로 맞고 있다
임영조, 자목련
화창한 봄날
고궁 뜰을 혼자서 거닐다가
우연히 마주친 여인
빙긋이 웃으며 아는 체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얼핏 생각 안 나는
저 지체 높고 우아한 자태
어느 명문가 홀로 된 마님 같다
진자주빛 비로도 저고리에
이루 다 말로 못할 슬픔이 서려
앞섶에 살짝 꽂은 금빛 브로치
햇빛 받아 더욱 눈부셔
함부로 범접하기 황송한지고
세상에 아직 잔정이 많아
서둘러 치장하고 봄 마중 나온 마님
안부를 묻듯 살바람만 건듯 스쳐도
금세 눈물이 앞을 가려
하르르 꽃잎부터 떨구는 작별
그 후로 세상은 또 한 차례
화사한 소문이 나돌듯
별의별 꽃말이 분분하였다
김경호, 금오산 가서
바람이 불지 않아도
오래 기다린 꽃잎은 진다
비오는 날 금오산 가서
나는 보았다
안갯속에 말없이 서 있는 숲과
숲에 쌓여 흔들리는 시간을
어느 쪽으로도 바람은 불지 않았다
안갯속에 사람들은
어지러이 길을 찾는데
돌아보면 그늘 되어 사라지는
우리의 하루
이 길, 이 걸음만 잃어지지 않고
홀로 서 있어도
제 꿈에 젖을 줄 아는
바람 불지 않아도 서둘지 않고
오래 기다린 제 한 몸 버릴 줄 아는
그대여
나는 그런 나무이고 싶었다
황학주, 저녁시간의 의자
물이 도는 곳으로 돌아와서 좋다
혹시 몰라 복대를 한 휘고 구부러진 슬픔이
내 등에서 따뜻해지는
자기 것 같은
자기 생머리 같은 시간들
전등을 잠시만 끄고 발아래 파도소리를 맞아도
있고 없는 것이 자리를 바꾸는 것일까
마음의 못생긴 의자에 돌아와
옷가지를 걸어놓는
주름 깊은 어둠
물기가 만져지는 이런 것들이
먼먼 바깥처럼 눈에 익는다
나는 아무도 없는 마음에 있고
또 그게 너무 많았다는
편지를 쓰며
날마다 바다 쪽으로 이사를 했다
어느 이별은 꼭 데리고 살면서 잘해주었다
바람 부는
어느 날 가출은 꽃가루처럼 복수인 구석이 있었다
이만큼 비워질 때까지 서서 지냈으니
구사일생, 그 말이 맞다
착 달라붙어 살겠다고
미친 것처럼
마음이 가던 날들을 떠올리곤
저녁시간의 의자는 목을 젖히며 까닥까닥 흔들린다
이성목, 노끈
마당을 쓸자 빗자루 끝에서 끈이 풀렸다
그대를 생각하면 마음의 갈래가 많았다
생각을 하나로 묶어 헛간에 세워두었던 때도 있었다
마당을 다 쓸고도 빗자루에 자꾸 손이 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마른 꽃대를 볕 아래 놓으니
마지막 눈송이가 열린 창문으로 날아들어
남은 향기를 품고 사라지는 걸 보았다
몸을 묶었으나 함께 살지는 못했다
쩡쩡 얼어붙었던 물소리가 저수지를 떠나고 있었다
묶었던 것을 스스로 풀고 멀리서 개울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