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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P님의 댓글에 반박입니다.
게시물ID : history_87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걷다가쿵해쪄
추천 : 10
조회수 : 54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5/04 04:11:20
한겨레 신문 기사를 링크합니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21015000/2007/12/021015000200712130689029.html

전라도 남부 일대를 왜인 귀족들이 다스렸을지도 모른다는 국내 학자의 글입니다. 중국 사서에 나온 걸로 보면 당시 왜의 영향력이 꽤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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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전방후원분 고분의 출토에 대한 글입니다.

권택장 학예연구사님의 글입니다.

"백제 삼근왕이 사망해 동성왕이 귀국했는데 지쿠시코쿠(筑紫國ㆍ북부 규슈계) 군사 500인이 호위했다."본서기 유랴쿠(雄略) 243년조의 기록이다. 475년 고구려군 공격에 백제는 21대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 한성을 내준다. 어렵게 웅진에 터를 마련했지만 4년 만에 3명의 국왕이 바뀌는 내분이 겹쳐 통치기구가 사실상 와해된다. 일본에 머물던 동성왕(479~501년)은 휘하 무사단을 이끌고 돌아와 백제 24대 왕에 오른다. 왕은 용병(傭兵)을 적극 끌어들여 백제를 위기에서 구해낸다.이후 500인의 무사단은 어떻게 됐을까. 문헌에서는 그들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그리고 왜인 용병은 비단 500명뿐이었을까.그런데 그들의 행적을 유추할 수 있는 왜(倭)계 무덤이 최근 한반도 남부에서 무더기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지난해 11월 고흥 풍양면 야막고분을 발굴하던 나주문화재연구소는 무덤 위에 돌을 깔고 봉분을 덮은(즙석) 낯선 형태의 고대 무덤을 찾아냈다. 권택장 연구사는 "3세기 후반~7세기 말 왜의 고훈(古墳)시대의 보편적 무덤"이라고 했다. 왜계 무덤은 분묘 양식과 주요 부장품 모두가 일본계인 것을 이른다. 야막고분을 포함해 현재까지 확인된 왜계고분은 모두 25기다. 영산강 일대에서는 고창 칠암리, 담양 고성리ㆍ성월리, 함평 장고산ㆍ신덕ㆍ표산, 광주 월계동ㆍ쌍암동ㆍ명화동, 영암 자라봉, 해남 용두리ㆍ조산ㆍ장고산 등 6세기 초 조성된 것으로 밝혀진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13기가 나왔다. 원형과 사각형의 분구가 붙은 형태의 이 무덤은 고훈시대 지배계층의 분묘 양식이다. 환구대도, 협갑(脇甲ㆍ갑옷) 등 부장품도 일본열도산이다.왜계는 같은 시기 공주 단지리ㆍ안영리, 부여 능산리 등 충청권에서 3기가 발굴됐고 경남 고성군 송학, 의령군 경산리ㆍ운곡리, 사천시 신진리, 거제시 장목, 창녕균 송현동 등 대가야권에서도 6기가 출토됐다. 신안 배널리, 고흥 안동ㆍ야막 등 3기는 5세기 초 만들어진 묘다. 영산강 외의 것들은 모두 단순히 무덤 표면에 돌을 쌓거나 내부에 요석(腰石)을 설치하고 붉게 채색한 중ㆍ하위층 무사의 무덤이다.동성왕이 혼란한 내부를 수습하는 방편으로 선택한 것이 남으로의 영토 확장이었다. 그는 13대 근초고왕(346~375년) 이래 백제의 영향권에 있던 영산강 방면을 백제 영토에 편입하기 위해 지방관을 파견하는데 이 일을 용병에게 맡긴다."왕이 무진주(武珍州ㆍ광주로 추정)를 순행했다"는 삼국사기 동성왕 20년조(498년) 기록을 볼 때 지방관들은 중앙의 통제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계 무덤에서 금제 귀걸이, 목관ㆍ제기 등 백제 왕실에서 하사한 다량의 위신재(威信財)가 나온 것도 이들이 백제 예속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왜인 용병의 상당수는 백제인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함평 신덕리 고분은 그들의 귀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신덕 1호분은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이지만, 바로 옆 2호분(아들 묘로 추정)은 백제의 능산리식 횡혈석실로 조성됐다. 전방후원분은 또 6세기 초에만 한정된다. 538년 사비(부여) 천도 후 한반도 남부를 직접 지배하게 되면서 용병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없게 됐음을 의미한다.
공주, 부여 왜계묘의 피장자는 고구려 방어를 위한 용병이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서부 경남지역의 무덤들은 대가야계 왜인 용병으로 판단된다. 대가야는 6세기 초 서부경남에 교두보를 확보한 것으로 추측된다.
5세기 초 신안과 고흥 고분의 주인공은 백제가 해로를 통해 여수반도와 하동지역을 공략할 때 동원된 왜인으로 해석된다.

이에 NPG님의 기사와 책을쓰신 박천수교수님의 글입니다.

박천수 경북대 교수는 "일본 사학계는 왜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한 임나일본부가 4세기부터 발전해 6세기에 소멸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지배계층의 전방후원분이 한반도에서 6세기 초 일시적으로 나타나며, 정치 중심세력화를 뜻하는 고분군을 형성하지 못한 점으로 미뤄 왜인들은 그저 용병 역할만 한 것을 알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때 반박했다는 글은 임나 일본부의 주장에 반박했다는 겁니다.

실제 임나일본부의 떡밥은 이미 지나갔다고 봅니다.
http://news1.kr/articles/640724">http://news1.kr/articles/64072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4222123555&code=960201
임나일본부설이 처음엔 지금의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가야가 고대 왜의 식민지였다고 했지만
막상 강에 대한 왜의 지배 내지 우위를 입증해줄만한 고고학적 유물 유적의 성과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하여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경남지방의 옛 가야 연맹에 대해서는 할말이 없어진게사실이었습니다.
고작 왜관련 유물이라고 해봤자 대성동 고분일부에서만 집중적으로나온 파형동기가 전부입니다.
(이 파형동기도 왜세력의 김해지방 지배의 흔적이 아니라 그저 교류차원의 성격에 불과하다고 보고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영산강 유역에서 집중적으로 전방후원분이 출토됨으로써 일본학계가 임나가 경남이아닌 전남 영산강 유역이라는 주장을 했었습니다.
영산강유역이 임나일본부라는 주장은 굉장히 문제가많습니다.
위 기사들을보면 갑작스레 전남지방의 대가야 고분발굴 기사입니다.
기사속 문제점은 임나 4현이란 6세기 백제 성왕때에 일본서기가 임나 4현이 마치 자기네 주권이 미치고있다가 대가야와 백제간에 이지역을 두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자 왜왕이 백제에 넘겼다는 식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임나 4현이라고 추정되는 이들지역에서 엉뚱하게 대가야 관련 고분, 유물이 발견된것입니다.
영산강 고분속 고인골의 DNA가 현대한국인보다 현대 일본인에 가깝다는 연구결과를 보면 왜계 인물들이었다는점을 부정하지않습니다.
하지만 이지역을 임나 일본부의 근거라고 단정지으면안되는것입니다.
임나일본부설 자체를 지금까지 들먹이는것조차 우습습니다.
임나일본부라는 기관명이 등장하는 일본서기에서 조차 임나일본부를 읽고 해석하는 주석에 미코토모찌 즉 수행하는 보조자의 의미로 읽고 해석하라고 나와있습니다.
6세기 성왕때 지금의 함안지역에 있던것으로 추청되는 안라가야가있는데 안라가야가 백제와 신라의 공세로 가야연맹의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고당회의를 개최하는데 여기에 왜의 사신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가 왜측에 항의한 기록이 나오는데 안라에 와있던 왜사신들이 안라왕을 위해 활동한다는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당시 안라에 와있던 왜사신은 왜에 건너간 안라인들이었습니다.
7세기 백제멸망이전까지 한일 양지역은 확실히 구분되는 타자라기보다는 한반도에서 상당수 한인들이 건너가 고향인 한반도 남부와 매우 긴밀한 정치 경제 문화 군사적 관계를 맺고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넘어간 한인들은 도래인이라고하는데 대표적으로 소가씨가 있습니다.
이 소가씨는 백제계 도래인으로 당시 아스카 시대를 좌지 우지 할정도의 힘을 가진 호족이었습니다.

일본서기가 진서라는것에 대해서 이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진서는 그 책의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로 구분하는것이 아닙니다. 진서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은 사실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진서라도 책을 근거로 역사적 사실을 논하지는 못합니다. 책의 내용의 진실 유무가 진서냐 위서냐의 차이점이 아니듯 진서가 그책의 내용이 진실이라는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대학시절 공대를 다니면서 고대사에 관심이 많아 고대사 수업을 들으며 임나일본부에관해 약 일년간 조사하고 토론을 하며 나름대로 지식을 쌓았었습니다. 사학도는 아니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으며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는 당연히 알고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죠.
그때 당시 모아뒀던 자료들은 컴퓨터를 바꿔 사용하며 찾기 힘들어 포기했지만 기본적으로 임나 일본부설과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운영했다는 것은 믿지않습니다.
뿐만아니라 위 영산강 일대에서 일본계 유물이 출토될뿐만아니라 중국의 화폐나 도자기등이 발굴되며 이는 중국과도 교류과 할발하다고 볼수있습니다. 이는 지배의 의미가 아닌 교류의 증거라고 보며 영산강일대는 서해와 남해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연안항로를 확인할수있습니다.

 

새벽이라 잠결에 쓰는데 건성건성 쓰지만 혹시나해서 쓰는 글입니다.

당시 왜는 한반도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다는 제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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