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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시절
게시물ID : lovestory_875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천재영
추천 : 1
조회수 : 38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9/05/07 10:34:30
신분증
 

6. 25 전쟁 직후에
오고가는 사람 신분
 

확인하게 위하여
도에서는 도민증
 

시에서는 시민증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시민증과 도민증으로
사는 곳 밝히던 시절
 

오랜만에 친구 만나면
먼저 신분증 자랑부터
 

그리고 세월은 흘러
주민등록 번호가 두 번
 

바뀌며 요즈음 주민번호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개인정보 보호로
주민번호 묻지 않습니다.
 

그 당시 대표적 달동네
남산주변 봉천동 해방촌
 

빈촌으로는 기찻길 주변
청계천 따라있던 판자촌
 

서울 땅 한 평이 농촌 논
몇 백 평을 살 수 있던
 

만약에 백 만 원이 생긴다면
하는 유행가가 유행 했고
 

그 돈이면 번듯한 기와집
살 수 있었고 집 앞 채마밭도
함께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입니다.
 
 
그 때 그 시절
 

서울 역 근처 넝마주이
담배꽁초 줍던 어린친구
 

신문팔고 구두 닦으려고
여기저기 달리 가던 청년
 

낮에는 갖가지 장사하고
밤엔 야학하던 고학생들
 

그래서 원하던 국가고시
행정고시 고등고시 또는
 

문 턱 높다는 시중은행 시험
합격하면서 그 당시 생긴 말
 

어렵게 공부해 목적 이룬
대성공 칭찬하는 뜻 담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말
개천에서 용 났다. ”
 

그렇게 어려움 이기고
노력한 사람들의 힘으로
 

나라 질서 잡혀 안정되고
집안 국가 경제 날로 성장
 

천지개벽 신화를 창조해낸
그들이 이젠 경제 일선에서
 

한 발 물러나 있지만 그들은
무엇이든 할 일이 주어지면
 

지금도 주저하지 않고
나서서 하겠다는 그 정신
오늘의 경제를 창조했습니다.
 

성공하려는 의지 이루고 싶은 목표
잠시도 망설이지 않는 실천 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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