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임영조, 안면도 사랑
이별은 때로 사랑을 완성하는가
황해 먼 바다로 고기잡이 갔다가
풍랑에 배 뒤집혀 익사했다던
그 젊은 어부가 살아왔는가
두고 온 사람 하나 너무 그리워
억겁을 헤엄쳐 오다오다 지쳐서 그만
태안 발치에 머리 두고 잠들었는가
우화등선 꿈꾸는 봄누에처럼
참았던 속엣말을 모두 풀어서
갸름하게 고치 틀고 기다리는 섬
파도소리 자장자장 다독거려도
잠 깊이 못 들고 뒤척이는 섬
영목 선창에 고깃배들 찰찰찰
날마다 헤딩하며 밀어올려도 이젠
뭍으로 가지 않는 안면도
이별도 때로는 사랑을 완성한다
안도현, 마당밥
일찍 나온 초저녁별이
지붕 끝에서 울기에
평상에 내려와서
밥 먹고 울어라, 했더니
그날 식구들 밥그릇 솟에는
별도 참 많이 뜨더라
찬 없이 보리밥 물 말아 먹는 저녁
옆에, 아버지 계시지 않더라
김은령, 꽃들의 팔뚝
연뿌리 두어 개를 사왔다
뽀얗게 다듬어 얄팍얄팍 썰어 놓으면
꽃 모양 반찬이 되는 그것 이전의
팔뚝같이 생긴 연꽃의 뿌리
흙 털고 껍질 벗기는 중에 스치는 생각
뿌리가 뿌리 이전의
한 알의 씨앗이었을 때의 설렘이
꽃을 피우는 일은
깜깜한 진흙 속에 파고들어
통뼈인양 시치미를 떼고 버티는 노고
숭숭숭숭 바람 든 이력을
짜-잔 하고 꽃 모양으로 변해주는 눈물겨운 결단
깨끗이 다듬어져 도마 위에 나란히 뉘인
백골 같은 그 뿌리 겨냥해 칼 갖다 대다가
해 본 생각
진흙 구렁텅이인 이 땅덩어리에 피어 있는
꽃들의 팔뚝
이동순, 돌아온 그날
숨죽여 남몰래 흐느끼며
꿈에서도 가위눌리던 쓰린 밤마다
내밀던 풀싹들 아예 밑동조차 잘려지더니
다시 되찾은 그 날의
꽃피고 새도 우는 벅찬 아침
고운 병풍 둘러놓고 공중의 혼들 모셔와서
한잔 막걸리나 받들어 올리오니
아픈 뼈 아직도 총알자국 쑤셔오는
다시금 돌아온 그날이여
끝끝내 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선 자리에 한번쯤 두 손 모으고 눈감으면
한껏 부푼 꽃방울들 온 천지에 터져오는데
눈에 왈칵 더운 것은 몰려오고
정녕 우리들의 하늘은 우리 것인가
또 한 번 남을 줘선 안될 그날
메마른 응달구석에서 씨뿌려 다독거리며
문득 하늘보고 와하하 소리치는 날
오래 못 본 사람들 파리한 얼굴로 돌아오고
그를 보러 온갖 신발 한데 얼려 붐비는 방 앞에서
손잡고 말없이 눈웃음 주고받는 날
어떤 겨울 땅에서도 얼어붙지 않았다는
흰 뿌리의 야무진 깊이를 보여준 그 날
한껏 되찾아야 할 사랑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