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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w_EfSftmiaU
송유미, 희망 유리상회
허름한 희망 유리상회 창문은
수족관처럼 뭉클뭉클 몰려다니는
양떼구름을 키우고 모래바람도 키운다
어느 창틀에든 맞게 잘라 놓은
여러 개의 유리들은
골목길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똑같은 크기의 승용차와 사람들을
무수히 복제해서 쏟아내기도 한다
때론 흐릿하거나 밝거나 어두운
희망 유리상회 창문 안을 기웃대면
심해에 사는 거북이처럼
등이 굽은 주인을 만날 수 있다
한 장 한 장 저마다 다른
바다를 품은 듯 바람에 잔물결 치는
희망 유리상회 문이 열린 날보다
문이 굳게 닫힌 날이 많은 희망 유리상회
어쩌다 밤늦게 그 앞을 지나노라면
밤바다보다 고요한 침묵에
나는 지느러미 돋는 한 마리 물고기가 된다
이기철, 무엇을 말하려 시를 쓰나
문장은 나를 밟고 지나간 발자국이다
내 사색의 몇 행 적자(嫡子)들이다
어느 젖줄을 물려 너의 몸에 신선한 피를 돌게할까
낙방유생이 짚신 초립으로 귀향하듯
나는 무관(無冠) 맨발의 환향을 꿈꾸는 서생이었다
저 바람 어제의 바람 아니듯이
나는 오늘 새로 태어난 말을 맞고 싶다
새 날아간 나뭇가지 오래 흔들리듯
시 다녀간 마음자락 오래 흔들린다
내 오래 딛고 온 글월의 들판에 오늘 무슨 꽃이 우는가
햇빛 물고 날아간 새의 부리는 빛났던가
물어도 대답 않는 언어로, 숯의 문장으로
나는 무엇을 말하려 시를 쓰나
동서고금, 그 많은 글발들이 남기고 간 행간에서
금욕주의 황제처럼 옥좌가 형극이라 말하면서
누구의 발자국소리에 귀 기울여 한 행 시를 얻으러
말의 거지가 되어 온 세월
시 위에 군림하는 삶을 끌어내려
삶 위에 온존하는 시를 쓰려했다
연애를 위한 언어가 아니라
연애에 배반당한 언어로 썼다
환희의 초대가 아니라 고통의 언어로 썼다
눈부신 사전을 진흙에 묻고 어둠에 묻힌 싸라기 말을 주우려
연필의 곡괭이로 언어를 채광했다
감동 없는 시는 위작이라고 나는 심혼에 압정을 박았다
고통이 보석이 되지 않는 말에 나는 시의 옷을 입힐 수 없다
꺼져가는 삶에 불붙일 언어는 어디에 잠자는가
나는 구중 광부의 정(釘)을 빌어 단 한 줄의 시를 쓰고 싶다
마침내 언어가 죽으면 문장을 닫을지라도
김사인, 거울
겁에 질린 한 사내 있네
머리칼은 다복솔 같고 수염자국 초라하네
위태롭게 다문 입술 보네
쫓겨온 저 사내와
아니라고 외치며 떠밀려온 내가
세상 끝 벼랑에서 마주 보네
손을 내밀까 악수를 하자고
오호, 악수라도 하자고
그냥 이대로 스치는 게 좋겠네
무서운 얼굴
서로 모른 척 지나는 게 좋겠네
신경림, 너희 사랑
낡은 교회 담벼락에 쓰여진
자잘한 낙서에서 너희 사랑은 싹텄다
흙바람 맵찬 골목과 불기 없는
자취방을 오가며 너희 사랑은 자랐다
가난이 싫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반 병의 소주와 한 마리 노가리를 놓고
망설이고 헤어지기 여러 번이었지만
뉘우치고 다짐하기 또 여러 밤이었지만
망설임과 헤매임 속에서 너희 사랑은
굳어졌다 새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깊어졌다
돌팔매와 최루탄에 찬 마룻바닥과
푸른옷에 비틀대기도 했으나
소주집과 생맥주집을 오가며
다시 너희 사랑은 다져졌다
그리하여 이제 너희 사랑은
낡은 교회 담벼락에 씌어진
낙서처럼 눈에 익은 너희 사랑은
단비가 되어 산동네를 적시는구나
훈풍이 되어 산동네를 누비는구나
골목길 오가며 싹튼 너희 사랑은
새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깊어지고 다져진 너희 사랑은
윤희상, 마음
가두지 않았다
담이 없다
울타리도 없다
부드러운 털을 지녔다
날뛰는 짐승들이 산다
날카로운 발톱을 지녔다
돌보는 사람도 없다
어디로 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