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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 나비를 읽는 법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 뿐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는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황학주, 종이 거울을 보는 남자
흰 도화지를 둥글게 오려
벽에 붙였다
집 앞에 떠있는 예쁜 섬들의 이름도 외우지 않는
나는 이제 누구의 마음도 훔치고 싶지 않아
때마침 내 안의 멍울에서 우러나오는 노을빛을 바라보는 것인데
내가 훔치고 싶은 건 허공의 내 얼굴
가볍고 낡은 악기 주자의 옷자락을 붙들고
허공을 헛디디며 내려오는 바람이 마른 붓으로 쓰다 지우는
종이로 만든 둥근 거울을
하루 한번 들여다본다
얼굴이 비치지 않는
나의 발굴은 나날이 깊어져가고
기나긴 해안선으로 흘러가는 바람을 그리듯 여전히 난항이지만
누구의 입김도 서리지 않으니
찾기만 한다면 그것은 진짜 나에 가까울 것이다
바래긴 해도 종이 거울은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삿짐 중 하나 가방에 넣어 직접 옮기는
흰 종이 거울
책꽂이 사이로 어둑어둑 밀물 드는 날
어떤 얼굴은 이처럼
우리 마음이 가진 몇 개의 둥근 우물의 백지로부터
소리 없이 발효되는 따뜻한 밑바닥으로부터
그리하여 몇 줄의 시로부터
신경림, 봄날
새벽 안개에 떠밀려서 봄바람에 취해서
갈 곳도 없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불현듯 내리니 이곳은 소음, 짙은 복사꽃 내음
언제 한번 살았던 곳일까
눈에 익은 골목, 소음들도 낯설지 않고
무엇이었을까,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이
낯익은 얼굴들은 내가 불러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복사꽃 내음 짙은 이곳은 소읍
먼 나라에서 온 외톨이가 되어
거리를 휘청대다가
봄 햇살에 취해서 새싹 향기에 들떠서
다시 버스에 올라. 잊어버리고
내가 무엇을 찾아 헤맸는가를
쥐어보면 빈 손, 잊어버리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서 내릴지도
박진성, 창문
우리는 수서역에서 만나
창문에서 헤어졌지. 안나
바람이 끌고 가는 바람의 길 안에
너는 서 있어
네가 손에 쥔 건 내 손가락이었지만
네 손금을 만질 때
감각과 운명은 가장 가까워졌어
안나, 나의 신체에도 창문 같은 것이 열릴까
너의 이름은 계속 지워져
그리고 창문으로 소심한 길들이 드나들지
손금, 그 작은 길에도
덤불이 있고 물기가 있고 전쟁이 있다면, 안나
나는 나뭇잎이 드나드는 창문이야
맨 처음 창문을 연 어떤 힘이야
우리는 수서역에서 만나
창문에서 헤어졌지
창문 안에 네가 있고 창문
바깥엔 내가 있어
수서역은 지하의 손금을 끌고
어두운 창문을 드나들고 있어
뭉텅뭉텅
잘리는 손금을 지하철 창문에 대어봐
창문 안엔 내가 있고
창문 바깥엔 수많은 네가 있어
찢어지고 있어
남진우, 봄비
누가 구름 위에
물항아리를 올려 놓았나
조용한 봄날 내 창가를 지나가는 구름
누가 구름 위의 물항아리를 기울여
내 머리맡에 물을 뿌리나
조용한 봄날 오후
내 몸을 덮고 지나가는 빗소리
졸음에 겨운 내 몸 여기저기서 싹트는 추억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