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천, 풍경
자운영 꽃밭 속에 염소 두 마리가 서 있다
열창노래방 저녁 속으로 도우미 아가씨 둘
다급하게 사라진다
풍경이 나를 싣고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자
저녁 뉴스는 하루치의 풍경 몇 개를 편집하여
세상 속으로 다시 내팽개쳐준다
운 없이 다리를 다친 풍경 몇 개는
한동안 애쓰며 절룩거려야 한다
풍경은 가끔 쇳내를 뒤집어쓰고
혼자서 녹이 슬기도 하겠지만
면 데, 풍경이라는 이름의 찻집 유리창 안으로
먼지 둘러쓴 시골 버스가 온다
온다는 것은 내 안의 풍경일 뿐
김완하, 눈사람
당신의 발자국 남은 거리에 눈이 날린다
발자국 지워진 그 위로 별빛 쌓인다
살다보면 쓸쓸한 마음 사이로는 새 길이 나서
그 길 따라 당신과 하나 되어 걷는다
당신 벌써 내 안에 달빛으로 스민다
최상호, 어머님이 주신 단잠
나는 내가 우리 집 비를 막아 주는
큰 나무가 못 되는 것이 늘 마음이 아팠다
그늘이 넉넉한 후박나무이거나
쨍쨍 햇살에도, 펑펑 내리는 눈에도
제 몫의 땅을 지키는
낙락장송이 못 되어서 언제나 미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내 옹이만 무성한 가지와
자잘한 이파리를 쓰다듬으시며
얘야
큰 나무는 큰 뿌리 탓에 집 안엔 심을 수
없단다
우리 집 마당에는 네가 딱 알맞구나 하시며
내 작은 그늘에다
돗자리 하나를 깔고 누우셨다
난생 처음으로
온몸이 가뿐해지는 단잠이었다
신경림, 돌 하나, 꽃 한송이
꽃을 좋아해 비구 두엇과 눈 속에 핀 매화에 취해도 보고
개망초 하얀 간척지 농투성이 농성에 덩달아도 보고
노래가 좋아 기성화장수 봉고에 실려 반도 횡단도 하고
버려진 광산촌에서 중로의 주모와 동무로 뒹굴기도 하고
이래서 이 세상에 돌로 버려지면 어쩌나 두려워하면서
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 꿈도 꾸면서
이재무, 봄밤
시인 박아무개가
지독한 가난에 두들겨 맞고
알코올성 치매에 영양실조에 폐암으로
중환자실 들어가 생사 넘나들던 밤
면회에서 돌아와 아내 몰래 수음을 했다
더러운 쾌락에 치를 떨며 결코 울지 않았다
여러 해의 봄 한꺼번에 흘러간 그 밤
청승 신파 뒤 술상 뒤엎던 울분과
소리높여 부르던 단심가
전화선을 타고 건너오던 물 젖은 소리
이제 너와 함께 과거에 묻는다
70년대 상경파의 불운한 생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꼬리 긴 주소를 지운다
세상에는 어제처럼
눈비 오고 바람 불고 구름 흐르고
해와 달은 떴다가 지며 묵은 달력 넘기겠지만
가던 걸음 문득 세워놓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그런 날 더러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