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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밤 바닷가에서
밤에도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파도가 철썩철썩인다
나는 모른다 모른다라고 말한다
이 밤에도 돌고 있는 라인이 있다고
파도가 겹겹이 밀려든다
나는 이제 모른다 모른다 한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파도가 내 가슴을 냅다 후려쳐버린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냐고
자갈처럼 구르며 울고만 싶다
20년 노동운동한다고 쫓아다니다
무슨 꿈도 없이 찾아간
밤 바닷가
김두안, 새의 기억
나무 그루터기 위에 눈이 쌓였습니다
새 한 마리
눈 위에 발자국을 놓고 갔습니다
가늘게 찍힌 발자국
어미 새의 생생한 기억일까요
밤새, 가지가 부러져 내려
얼키설키 쌓인 눈
한 때 받아먹던 환한 둥지일까요
그루터기 위 쌓인 눈
톱날 자국 밀어내며 가장자리부터 녹습니다
순백의 눈 아우성을 치며 사라집니다
우람한 바람
긴 가지를 늘어뜨리며 쓰러집니다
얼어붙은 새 발자국
물컹
물이 되는 새 발자국
그루터기 중심을 향해 스며듭니다
오규원, 4월과 아침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와르르 태어나
잠시 서로 어리둥절하네
4월하고도 맑은 햇빛 쏟아지는 아침
밤새 젖은 풀 사이에 서 있다가
몸이 축축해진 바람이 풀밭에서 나와
나무 위로 올라가 있네
어제 밤하늘에 가서 별이 되어 반짝이다가
슬그머니 제 자리로 돌아온 돌들이
늦은 아침잠에 단단하게 들어있네
신경림, 소요유(逍遙遊)
전파상 옆에는 국숫집이 있고 통닭집이 있고
옷가게를 지나면 약방이 나오고 청과물상이 나온다
내가 십 년을 넘게 오간 장골목이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이다, 매일처럼 새로운 볼거리가 나타나니
십 년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이제야 보고
한 달 전에 안 보이던 것이 오늘에사 보인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달려가서, 더러는
옛날 떠돌던 시골 소읍과 장거리를 서성이기도 한다
밝은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흐려진 눈으로 새롭게 찾아내고
젊어서 듣고 만지지 못했던 것들을
어두워진 귀와 둔하고 탁해진 손으로
듣고 만지고, 다시 보는 즐거움에 빠져서
밝은 눈과 젊은 귀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흐린 눈과 늙은 귀에 비로소 들어온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그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을 나는 안다
나는 섭섭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를 끝내는 날이 될지라도
천양희, 나는 어서 말해야 한다
누가 산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먼저
나무처럼 곧은 언어는 없다고 말하고
누가 숲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먼저
새에 대해 말하겠네
마침내 새가 솟구쳐올라 허공을 남길 때
나도 빈 둥지처럼 비어 버리겠네
누가 다시 새에 대해 말하라면
나는 먼저
울음에 대해 말하고
그 울음의 진동이 잉잉거릴 때
누가 물음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먼저
물에 대해 말하고
나도 물에게 길을 물으면서 흘러가 보겠네
누가 다시 물에 대해 말하라면
삶이 쓴 최고의 문장이라고 말하고 말겠네
물에 대해 길게 말하다 보면
어느새 산 아래 내려와 있네
올라간 길도 따라와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