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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영, 비
순이 뒷산에 두견이 노래하는 사월달이면
비는 새파아란 잔디를 밟으며 온다
비는 눈이 수정처럼 맑다
비는 하이얀 진주 목걸이를 자랑한다
비는 수양버들 그늘에서
한종일 은빛 레이스를 짜고 있다
비는 대낮에도 나를 키스한다
비는 입술이 함씬 딸기물에 젖었다
비는 고요한 노래를 불러
벚꽃 향기 풍기는 황혼을 데려온다
비는 어디서 자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순이 우리가 촛불을 밝히고 마주 앉을 때
비는 밤 깊도록 창 박에서 종알거리다가
이윽고 아침이면 어디론지 가고 보이지 않는다
황학주, 짝
어둑해져 도착한 마음은 붓끝을 꿈결에 두었다
감은사지는 뼈를 묻었는지
낮의 문장과 밤의 문장 사이 오래된 초승달이 떴다
가끔은 서로의 문장들 팍삭 깨지기도 하는
동탑과 서탑
심장을 싸맨 채 우는 날도 흔하겠으나
견딜 의사가 있는 자세로
돌 안에 악기를 둔 마음으로
낮의 문장과 밤의 문장 어느 쪽이든
저마다 감은사를 가졌답니다
세상에 나간 적 없는 바깥을 아득히 펼친
동탑과 서탑을 실로 묶듯
나는 눈에 안 띄는 문장으로 두 탑을 돌았다
차가운 11월 초승이라고는 하나
짝을 가진 그 밤
감은사라 부르기 전부터 지새우던
하룻밤이 타올랐다
탑 사이 행간엔 낮밤이 없었다
손태연, 저녁 식사 취소
우럭 한 마리를 도마 위로 올리는 순간
들고 있던 부엌칼이 멈칫했다
가시를 바싹 세운 검은 우럭이
식칼을 노려보다가
나랑 눈이 맞았다
에라, 네 말 나는 못 들었다
그의 눈 외면한 채 냉동실로 보낸다
연포탕 메뉴가 걸린 저녁 식탁
낙지가 든 물 봉지를 가위로 자르니
산 낙지가 그릇 속으로 긴 다리를 풀어낸다
하, 고놈들 눈이나 감고 있지
짱짱하게 발가락 붙이고 일어서서 노려보며
벌벌 떠는 나를 읽고 있는 것이다
숨 돌리려 창가로 가
팔 괴고 하늘을 보니
거대한 눈[眼]이 부릅뜬 채
나의 하루를 내려다본다
도마 위에 놓인 나를
한칼에 칠지도 모르는
저 무시무시한 저녁 하늘
최영철, 돌돌
순한 것들은 돌돌 말려 죽어간다
죽을 때가 가까우면 순하게 돌돌 말린다
고개 숙이는 것 조아리는 것 무릎 꿇는 것
엊그제 떨어진 잎이 돌돌 말렸다
저 건너 건너 밭고랑
호미를 놓친 노인 돌돌 말렸다
오래전부터 돌돌 말려가고 있었다
돌돌 말린 등으로
수레가 구르듯 세 고랑을 맸다
날 때부터 구부러져 있었던 호미를 들고
호미처럼 구부러지며
고랑 끝까지 왔다
고랑에 돌돌 말려
고랑 끝에 다다른 노인 곁에
몸을 둥글게 만 잎들이 모여들었다
돌돌 저 먼데서부터 몸을 말며
여기까지 왔다
오세영, 4월
언제 우레 소리 그쳤던가
문득 내다보면
4월이 거기 있어라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언제 먹구름 개었던가
문득 내다보면
푸르게 빛나는 강물
4월은 거기 있어라
젊은 날은 또 얼마나 괴로웠던가
열병의 뜨거운 입술이
꽃잎으로 벙그는 4월
눈뜨면 문득
너는 한 송이 목련인 것을
누가 이별을 서럽다고 했던가
우르르 우르르 빈 가슴 울리던 격정은 자고
돌아보면 문득
사방은 눈부시게 푸르른 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