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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물미역 씻던 손
한밤
물미역 씻는 소리는
어느 푸른 동공(童孔)을 돌아 나온 메아리 같네
간장에 설탕을 넣고 젓는 소리는 또
그 메아리를 따라 나온 젖먹이 같네
한밤에 찬장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를 아는가
밥 위에 내려앉는 백열등 불빛을 아는가
울음 세 개 간직한
물미역 씻던 손
송진호, 풀향
산 풀에 내리는 비는
다습한 산풀향을 냅니다
마른 풀 위에 내리는 햇살은
잘 말린 마른 풀향을 냅니다
풀향이
멀고도 가까운
가깝고도 먼 골짜기에서 와
저쪽은 멀고
이쪽이 가깝다고 합니다
아니
이쪽이 멀고
저쪽이 가깝다고 합니다
산 풀에 해가 내리기도 하고
마른풀이 비에 젖기도 하지만
산 풀은 산풀향
마른 풀은 마른 풀향
그냥 그렇길 바랄 뿐입니다
오명선, 자물쇠
숲의 빗장이 풀리고
나무들이 빛을 찍어 바른다
열쇠는
저 연둣빛 바람, 그리고 빗소리
한때 꿈쩍 않는 문 앞에 서있었다
시큰거리는 팔목으로
매달린 자물쇠를 수만 번 흔들었다
빛이 사라진 길은 어두웠다
나는 점점 지워지고
마음으로 드는 길, 끝내 찾지 못했다
가끔 나를 열고
너를 꺼내 본다
그때, 우리는
죽은 새의 울음을 베고 잤는지도 모른다
이규리, 미안해서
자작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
찬물 냄새가 났지
흰 빛, 먼 빛
매혹은 떠올릴 때마다 안에서 자라고 있었지
극지의 나무, 왜 흰색에 매달리느냐고 묻겠지만
그 눈부심 위에
상부를 담당하는 엉성하고 자잘한 잎들
제 목소리를 가두고 있는 최소의 몸짓들
미안해서, 라고 말할까
모든 잎들이 하얀 수피에 봉사하고 있었네
흰빛을 드러내려 제 성장을 죽이고 있었네
열이 많다고 자기 외투를 벗어 주던
밥이 모자랄 때면 배부르다 멀찍이 물러앉던
얼굴 하얀 언니가 그러했지
언니가 내 뒤에 숨어 키도 몸도 줄였던 자작이었어 이파리였어
흰빛은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닐 거야
누군가 죽은, 양보한, 바꾼 목숨이
표백되어 즐비하게 부신 거라
생각날 때마다 하아 하아 박하향 흘려주는 거라
장하빈, 부지깽이 전언(傳言)
아궁이에 군불 지펴보면 안다
불길과 연기가 내통하는 길 있다는 것을
참나무 장작 꾸역꾸역 밀어 넣어보면 안다
구들장 아래 방고래로 불길 지나기 위해서
때때로 바닥에 엎드려 눈물 쏟아야 한다는 것을
방 아랫목 싸늘해진 새벽녘 깨어나
캄캄한 아궁이 들여다본다
산다는 것, 이렇게 검게 속 태우는 일이거나
불구덩이 뛰어들었다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일이라며
산더미처럼 쌓인 재 푹푹 퍼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