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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를 이끄는 사내는
흰 남방에 검은 바지를 입었다
비 오는 논둑길 마을은 먼데
지아비를 따르는 식솔들에게
차라리 우산은 바람에 날리기만 하고
저 사내의 좁은 어깨가
일가의 비받이
오세영, 먼 후일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나 이제 아무데나
쉬어야겠다
동백꽃 없어도 좋으리
해당화 없어도 좋으리
흐린 수평선 너머 아득한 봄 하늘 다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면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나 이제 아무나
그리움 풀어야겠다
갈매기 없어도 좋으리
동박새 없어도 좋으리
은빛 가물거리는 파도 너머 지는 노을 다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면
가까운 포구가 아니라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먼 후일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서안나, 꼬리에 관하여
나는 한때 꼬리의 수사에 몰두한 적이 있다
용두사미 혹은 어떤 무리의 끝
꼬리를 빼거나 꼬리를 내린다는 말에선
상처 입은 짐승의 피 냄새가 난다
천박한 도주의 내력도 새겨져 있다
꼬리란 동물에게 사냥의 전반부에 해당된다
머리 가장 반대편의
먹이를 따라잡기 위한 탐색의 상징이다
항문보다 뒤에 착하게 늘어져
몸의 균형을 잡아주고
커다란 몸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
부드러운 질주의 시작이다
밥을 먹고 글을 쓰고
거대한 것들에 경배했으나 나는
돌돌 말려진 비겁한 꼬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인생은 한 방이라는 당신 앞에서
난 긴꼬리원숭이처럼 서른 두개의 이빨로 조야하게 웃거나
망토비비 꼬리처럼 가늘어 지곤 했다
신념의 시작에서 자라는 꼬리에 대한 이해를
부끄러운 얼굴로 일기장에 적는다
낮은 힘으로 상처를 뛰어넘고
질주의 힘을 부드럽게 감아 두기도 하는 꼬리의 흔적을
나는 전생부터 갖고 있었다
나는 오래된 꼬리의 용도를 가다듬고 있다
김명리, 제비꽃 꽃잎 속
퇴락한 절집의 돌계단에 오래 웅크리고
돌의 톰서리를 비집고 올라 온
보랏빛 제비꽃 꽃잎 속을 헤아려본다
어떤 슬픔도 삶의 산막 같은 몸뚱어리를
쉽게 부서뜨리지는 못 했으니
제비꽃 꽃잎 속처럼 나 벌거벗은 채
천둥 치는 빗속을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내 몸을 휩싸는 폭죽 같은 봄의 무게여
내가 부둥켜안고 뒹구는 이것들이
혹여라도 구름 그림자라고는 말하지 말아라
네가 울 때, 너는 네 안의 수분을 다하여 울었으나
솜 타는 꽃잎 속 흐드러진 암향이여
우리 이대로 반공중(半空中)에 더 납작 엎드리자
휘몰아치는 봄의 무게에
대적광전 기우뚱한 추녀 또한 뱃고동 소리로 운다
장하빈, 하루
밥숟가락 들었다 놓는 사이
하루가 지나갔다
하얀 진신사리(眞身舍利)
시래깃국에서 건져 올리는
아침상 물리자마자
쪽문으로 들어온 이웃집 멍멍이
개똥 차반 차려놓고 가는
따뜻한 저녁 맞는다
식탁 귀에 놓인 앉은뱅이달력
당기면 하루가 오고
밀치면 하루가 갔다
허공의 까치밥 쳐다보는 사이
한 생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