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새끼 고양이
들키고 싶었어요
지붕 위에 오래 앉아
지난 밤 꿈이 탈색되는 걸 바라보았죠
눈이 가늘어지고, 수염이 팽팽히 서고
나는 점프해서 멀리
날아가는 상상도 못한 채
마음을 둥글게 말고 앉아있었죠
들키고 싶어서
전깃줄을 타고 건너다니는 봄
비밀은 너무 가볍거나 무겁죠
몇 번 웃어버리고 나면 얇아져요
머리를 누르는 건 모자가 아니죠
견고한 빛의 무게
태양이 떨어뜨린 살비듬
매일이 환한 낮잠 같아요
가끔 담벼락을 손으로 짚고
울며 가는 사람을 볼 때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죠
이봐요, 이번 생의 그림에선
파란 바탕이 나예요
당신이 울고 지나간
문인수, 손전등
밤중에, 이 악산 아래 오랜 세월
주저앉고 있는 폐가 한 채를 둘러본다
손전등 불빛이 더듬는 방 두 칸, 부엌 한 칸
그리고 거기 널린 잡동사니 부장품(副葬品)들
목장갑 뭉텅이며 몽당빗자루며 찌그러진 양은냄비 같은 것들이 무슨
자존심이나 수치심이라도 건드린 것인지
깜깜하게 돌아누워 버린다
나는 메시아처럼 여기저기 비추며 계속 둘러봤으나
그 어떤 행복도 행운도 읽어내지 못하고
억새 소리, 부엉이 소리만 으스스 부려놓고 간다
어둠 속으로 금세 허물어져 가라앉는 저
남의 집, 뒤집어쓰며 자꾸 뒤돌아보는
슬픔, 슬픔끼리는 모두 일족이겠으나
나는, 내 인생이나 잔뜩 챙겨간다
문숙, 홍시
너를 사랑하는 일이
떫은맛을 버려야 하는 일이네
물렁해져 중심마저 버려야 하는 일이네
긴 시간 네 그림자에 갇혀
어둠을 견뎌야만 하는 일이네
모든 감각을 닫고 먹먹해져야 하는 일이네
겉은 두고 속만 허물어야 하는 일이네
붉은 울음을 안으로 쟁이는 일이네
사랑이란
일생 심지도 없이 살아야 하는 일이네
결국 네 허기진 속을 나로 채우는 일이네
박상천, 복권 가게 앞에서
아이와 함께 길을 걷다가
문득 복권이 사고 싶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다가
잠시 망설인다
복권을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긴 싫어
꾸욱 참고 가게 앞을 그냥 지나쳐 간다
자꾸만 호주머니에 손이 가지만
아이에게 변명할 말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내 행동을 이해하도록 설명해주어야 할 만큼
아이가 자라고 나니
이제 나는
복권을 사고 싶은 나이
참 쓸쓸하고 허전한 나이에 이르고 말았다
이윤학, 당신
민들레 씨가 날아가다
살아보자
내게 붙었지요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나는 언제까지
가슴속 손안에
당신을 쥐고 살아야 하나요
나는 민들레 씨를
지난 봄날 햇볕 한 뭉치를
입속에 삼키고 말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