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희, 곡선
긴 골목 끝
사람들에게 우회전하라고
가리키는 모퉁이
표지판도 위험 알리는
삼각 깃발도 물론
없는 이름없는 담벼락을
네가 꺾어 돌아가 드디어
보이지 않을 때 세상의
모든 길이 곡선인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
나태주, 황홀
시시각각 물이 말라 졸아붙는 웅덩이를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오직 웅덩이를 천국으로 알고 살아가던
송사리 몇 마리
파닥파닥 튀어 오르다가 뒤채다가
끝내는 잠잠해지는 몸짓
송사리 엷은 비늘에 어리어 파랗게
무지개를 세우던 햇빛, 그 황홀
이상국,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 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은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송경동, 무허가
용산4가 철거민 참사 현장
검거해 들어온 빈집 구석에서 시를 쓴다
생각해보니 작년엔 가리봉동 기륭전자 앞
노상 턴테이너에서 무단으로 살았다
구로역 CC카메라탑을 점검하고
광장에서 불법 텐트 생활을 하기도 했다
국회의사당을 두 번이나 점거해
퇴거 불응으로 끌려나오기도 했다
전엔 대추리 빈집을 털어 살기도 했지
허가받을 수 없는 인생
그런 내 삶처럼
내 시도 영영 무허가였으면 좋겠다
누구나 들어와 살 수 있는
이 세상 전체가
무허가였으면 좋겠다
천양희, 입
황닷거미는 입에다 제 알집을 물고 다닌다는데
시크리드 물고기는 입에다 제 새끼를 미소처럼 머금고 있다는데
나는 입으로 온갖 업을 저지르네
말이 망치가 되어 뒤통수를 칠 때
무심한 한마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때
입은 얼마나 무서운 구멍인가
흰띠거품벌레는 입에다 거품을 삼킨다는데
황새는 입에 울대가 없어 울지도 못한다는데
나는 입으로 온갖 비명을 내지르네
입이 철문이 되어 침묵할 때
나도 모르는 것을 나도 모르게 고백할 때
입은 얼마나 끔직한 소용돌이인가
때로 말이 화근이라는 걸 알려주는 입
입에다 말을 새끼처럼 머금고 싶네
말없이 말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