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시간들
48년 9개월의 시간 K가 엎질러져 있다
시원히 흐르지 못하고
코를 골며 모로 누워 있다
액체이면서 한사코 고체처럼 위장되어 있다
넝마의 바지 밖으로
시간의 더러운 발목이 부었다
소주에 오래 노출되어 시간 K는 벌겋다
끈끈한 침이 흘러
얼굴 부분을 땅바닥에 이어놓고 있다
시간 K는 옆구리와 가려운 겨드랑이 부위를 가지고 있다
잠결에 긁어보지만 쉬 터지지는 않는다
흘러갈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더러운 봉지에 갇혀 시간은 썩어간다
비닐이 터지면 시간 K도
힘없는 눈물처럼 주르르 흐를 것이다
시큼한 냄새와 함께 잠시 지하도 모퉁이를 적시다가
곧 마를 것이다 비정규직의 시간들이
밀걸레를 가지고 올 것이다
허깨비 같은 시간들, 시간 봉지들
윤의섭, 담장에 기대어
기댄다는 것은 이렇게 등이 따습고
멀리 텅 빈 나뭇가지를 바라보면서도 무너지지 않을 거라 위로할 수 있는 것
내게
비가 내리면 묵묵히 젖어 주고
태양이 떠오르고 기울 때마다 사라지는 날들의
궤도를 새겨 주고
잃어버린 길이라도 물어 오면 다만 막혔을 뿐이라고 이 너머에 다 있다고
아니
피안은 늘 머리맡에서 찰랑이지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는 지켜져야 한다
모든 존재의 이유는 함부로 깨트려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외로움 같은 게 이끼처럼 차오르더라도 죽여 버릴 수는 없다
기댄다는 것은 이렇게 등 뒤를 무방비 상태로 맡겨 두고 배수진을 치고
용납해야 한다는 것이다
철새는 무심히 떠나가고
희미하게 갈라진 금 사이로 꿈결인 듯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내
유일한 배경이여
온 몸으로 금이 번진다 같이 바라보던 별이 떠오르고
금줄을 따라 결코 아물지 않을 별자리가 그어진다
김경미, 오늘의 결심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높은 곳에 살지 않겠다
초저녁 별빛보다 많은 등을 켜지 않겠다
여행용 트렁크는 나의 서재
지구 끝까지 들고 가겠다
썩은 치아 같은 실망
오후에는 꼭 치과엘 가겠다
밤하늘에 노랗게 불 켜진 보름달을
신호등으로 알고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으되
다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티끌 같은 월요일에
생각할수록 티끌 같은 금요일까지
창틀먼지에다치거나
내 어금니에 혀 물린 날 더 많았으되
함부로 상처받지 않겠다
목차들 재미없어도
크게 서운해하지 않겠다
너무 재미있어도 고단하다
잦은 서운함도 고단하다
한계를 알지만
제 발목보다 가는 담벼락 위를 걷는
갈색의 고양이처럼
비관 없는 애정의 습관도 길러보겠다
박성우, 거미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 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장석남, 망명
어둡는데
의자를 하나 내놓으면
어둠 속으로 의자는 가겠지
어둡는데
꽃 핀 화분도 하나 내놓으면
어둠 속으로 꽃도 잠겨가겠지
발걸음도 내놓으면 가져가겠지
어둠은 그렇게 식구를 늘려서 돌아가
어둠을 오가는 넋에게도 길 닦아주고
견고한 잠 속에는 나라를 세우고 나머진
빛으로 돌려 보낼 터
어둡는데 길을 나서면
한 줌 먼동으로 돌아올 터
어둠에 살을 준다
사랑에 살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