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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달팽이
귓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낱으로 목을 축였을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도적굴로 붙들려간 옛적 누이거나
평생 앞 못 보던 외조부의 골방이라고도 하지만
부끄러운 저 구멍 너머에서는
누구건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 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 길을
나희덕, 이따금 봄이 찾아와
내 말이 네게로 흐르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공중에서 얼어붙는다
허공에 닿자 굳어버리는 거미줄처럼
침묵의 소문만이 무성할 뿐
말의 얼음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따금 봄이 찾아와
새로 햇빛을 받은 말들이
따뜻한 물속에 녹기 시작한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지랑이처럼
물오른 말이 다른 말을 부르고 있다
부디
이 소란스러움을 용서하시라
함민복, 흐린 날의 연서
까마귀산에 그녀가 산다
비는 내리고 까마귀산자락에서 서성거렸다
백번 그녀를 만나고 한번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였다
예술의 전당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고
먼저 전화 걸던 사람이
그래도 당신
검은 빗방울이 머리통을 두드리고
내부로만 점층법처럼 커지는 소리
당신이 가지고 다니던 가죽가방 그 가죽의 주인
어느 동물과의 인연 같은 인연이라면
내 당신을 잊겠다는 말을 전하려고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독해지는 마음만
까마귀산자락 여인숙으로 들어가
빗소리보다 더 가늘고 슬프게 울었다
모기가 내 눈동자의 피를 빨게 될지라도
내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리라
그래도 당신
이대흠, 행복
삶은 빨래 너는데
치아 고른 당신의 미소 같은
햇살 오셨다
감잎처럼 순한 귀를 가진
당신 생각에
내 마음에
연둣물이 들었다
대숲과 솔숲은
막 빚은 공기를 듬뿍 주시고
찻잎 같은 새소리를
덤으로 주셨다
찻물이 붕어 눈알처럼
씌롱씌롱 끓고
당신이 가져다준
황차도 익었다
장석남, 해변의 자화상
그 물가에 갈 수 없으므로
그 물가를 생각한다
그 물가에 선 생각을 하고
그 물가의 풍경을 생각한다
물소리를 생각한다
그리움 따위는 분명 아니고 기운 떨어지면 찾아오는
향수 같은 것도 아니고
그보다는 깊은, 그보다는 더 해맑은 것이
나를 데려간다
나는 천상 회고파(回顧派)지만
그곳에서는 회고파만은 아니다
어느덧 그 물소리 속 수레바퀴들이 나를 실어
석양을 앞질러 간다
갈잎과 바람을 넘어
기러기들의 순례를 넘어간다
빛의 화살 끝에 묻어 어느 별을 뚫고
죄를 뚫는다
허나 이내 나는 그 수레 위에 있지 않고
그저 그대로 그 물가에 서서
어느새 밑단이 젖은 바지를 걷고 서서
물소리를 바라본다
그 물가에 서 있는 나를 나는
생각한다
그리움도 향수도 아닌 그보다도 더
해맑은 것이 나를 안아다
그 물가에 놓는다
그 물가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