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희, 틈이 풍경을 만든다
폐교된 초등학교 교실 유리문 안으로
담쟁이 넝쿨이 올라가고 있다
밤이나 낮이나 꼭꼭 닫혀 있던 문
그 보이지 않는 틈 사이
바람이 드나들었을까
햇살이 길을 내었을까
아장아장 어린잎들이 단단한 줄기를 따라
푸른 발바닥 자꾸 내밀고 있다
그럴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내 생애를 합한 것도
남몰래 저 틈 하나 보았기 때문일 터
세상의 모든 문들이
너와 내가
안과 밖이란 차디찬 경계를 만들고 살았어도
어느 날 문득 환한 시선 하나가
봄을 만들고
길을 만들고
문장을 만들고
아이들이 없는 빈 교실에
반짝반짝 초록빛을 따라
다시 그려지고 있는 저 눈부신 기억들
드르륵, 소녀 하나 문을 열고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원태경, 꽃놀이
명복공원 굴뚝에서
펑, 쏘아 올려진
울 아부지는
아주 멀리 날아
불꽃처럼 휙휙 날아가다
툭
내 꿈에 꽃 가지 하나 떨구고
톡
내 몸에 꽃잎 하나 떨구고
얕은 내 잠에 잔물결 일 때
마침내 쏟아 놓은 별똥별
블링블링
밤하늘 온통
꽃 잔치 벌이지
그 재미에
홀딱 빠져서
내게는 얼굴 한번 내밀지 않지
김선우, 꽃, 이라는 유심론
눈앞에 열 명의 사람이 푸른 손을 흔들며 지나가도
백 명의 사람의 흰 구름을 펼쳐 보여도
낸 눈엔 그대만 보이는
그대에게만 가서 꽂히는
마음
오직 그대에게만 맞는 열쇠처럼
그대가 아니면
내 마음
나의 핵심을 열 수 없는
꽃이
지는
이유
임정옥, 새처럼 앉다
검은머리물떼새 한 마리
강가 흰 모래톱에 앉아 있다
풍경이 된다는 것은 혼자가 되는 것
새는 무리에서 떨어져 앉았다
강은 팽팽하게 흘러가고
그 위로 낯선 새들의 이름이
푸른 포물선을 펼치며 날아갔다
강가엔 붉은 양산을 든 자운영
소풍 길 여학생처럼 산들어지는데
덩달아 길을 나서는 풀꽃들의
싱싱한 웃음소리 흐트러지는데
날개 펴는 아득한 소리
등 뒤에서 듣는다
또 한 무리 새들이 일어서
깃발처럼 날아간다
길은 원근법으로 지워지고
지워지는 길을 따라 저녁이 온다
더는 아무것도 날지 않는 시간
나는 강둑에서 일어나 두어 걸음 옮겨
짙은 어둠 곁에 새처럼 앉았다
손택수, 입술
명옥헌 못에 숲이 비친다
숲은 제 그림자와 만나 도톰한
입술이 된다
떠가는 배 같고, 물고기 같고
산에 벚꽃 피면
일찍 뜬 달 같기도 한
아래와 위가 포개진 못 가장자리를
눈에 띄지 않게 달싹이고 있다 복화술사처럼
그 입술에 연지를 입히려고 백일홍을 심었던가
꽃은 떨어져서 꾹 다문 입술에
주름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