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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봄날
바람은
강을 거슬러 올라
나무들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고
눈을 감으면
언 땅에서 풀려나는
시냇물 소리
개나리꽃은 피어서
설레는 마음을 덮고
낯익은 들판마다
천의 젖니를 반짝이며
돌아오는 강물처럼
저 결 고운 사구(砂丘)를
건너오시는 그대
그대 걸음, 걸음마다
꽃씨들은 눈부신 껍질을 벗는데
하얀 발목 빛내면서
잠든 아기의 숨소리처럼
내게 다가오는 이
그대, 누구신가
하종오, 초봄이 오다
산수유 한 그루 캐어 집에 옮기려고
산에 가만가만 숨어들었다
나무는 뿌리를 밑으로 밑으로 내려놓았겠지
자그마한 산수유 찾아 삽날을 깊숙이 꽂았다
이제 한 삽 뜨면 산에게서 내게로 올 게다
겨울 내내 집안은 텅 비고 날 찾아오는 이 없었어
이제 마당귀에 산수유 심어놓고
그 옆에서 꽃 피길 기다리면
이 산이라도 날 찾아오겠지
삽자루에 힘을 주어도 떠지지 않아서
뿌리 언저리 손으로 파헤쳐보았다
산수유는 뿌리를 옆으로 옆으로 벌려놓고 있었다
나는 삽날 눕혀 뿌리 밑을 돌아가며
둥그렇게 뜬 뒤 밑동 잡고 들어올렸다
한 그루 작은 산수유 실뿌리 뚜두두둑 뚜두두둑 끊기자
산에 있던 모든 산수유들 아픈지 파다닥파다닥
노란 꽃망울들 터뜨렸다
임정옥, 바다의 사원(寺院)
뜨거운 말은 바다로 간다
사람들이 저마다 숨기고 사는
그리운 말도 바다로 간다
파도가 바위를 둥글게 깎아
까맣게 빛나는 저 몽돌은
아직 고백하지 못한
파도의 말인지 모른다
그대가 하루, 아니 사흘쯤
차갑고 단단한 몽돌해변에 서서
노을 지는 바다와
달 뜨는 바다를 만난다면
수평선에서 멀어질수록 간절해지고
수평선에서 가까워질수록 아득해지는
파도의 묵언을 들을 것이다
뜨겁거나 그리운 사람의 말이
상처의 흔적 다닥다닥 등에 달고 와서
바다의 사원을 짓는 날
파도가 그대를 찾아와
모든 것을 버리는 날
이문재, 봄이 고인다
봄이 고이더라
공중에도 고이더라
바닥없는 곳에도 고이더라
봄이 고여서
산에 들에 물이 오르더라
풀과 나무에 연초록
연초록이 번지더라
봄은 고여서
너럭바위도 잔뿌리를 내리더라
낮게 갠 하늘 한 걸음 더 내려와
아지랑이 훌훌 빨아들이더라
천지간이 더워지더라
봄이 고이고
꽃들이 문을 열어젖히더라
진짜 만개는 꽃이 문 열기 직전이더라
벌 나비 윙윙 벌떼처럼 날아들더라
이것도 영락없는 줄탁 줄탁이러니
눈을 감아도 눈이 시더라
눈이 시더라
차영호, 묵언(黙言)
여름내 외딴 등나무 밑에 누워
별을 헤아렸다
오랜 세월동안 제풀에 삭은 버팀목
태풍을 핑계로 스러졌다
평생 스스로 서지 못하고
버팀목에 기대온
등(藤)
제가 제 몸을 제 몸에 비비꼬고
직립(直立), 밤마다 별을 닦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