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yz8YlDUZAyg
한영옥, 다시 하얗게
어느 날은
긴 어둠의 밤 가르며
기차 지나가는 소리, 영락없이
비 쏟는 소리 같았는데
또 어느 날은
긴 어둠의 밤 깔고
저벅대는 빗소리, 영락없이
기차 들어오는 소리 같았는데
그 밤기차에서도 당신은
내리지 않으셨고
그 밤비 속에서도 당신은
쏟아지지 않으셨고
뛰쳐나가 우두커니 섰던 정거장엔
얼굴 익힌 바람만 쏴하였습니다
다시 하얗게 칠해지곤 하는 날들
맥없이 눈이 부시기도 하고
우물우물 밥이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윤중호, 시래기
곰삭은 흙벽에 매달려
찬바람에 물기 죄다 지우고
배배 말라가면서
그저, 한겨울 따뜻한 죽 한 그릇 될 수 있다면
공광규, 아내
아내를 들어올리는데
마른 풀단처럼 가볍다
두 마리 짐승이 몸을 찢고 나와
꿰맨 적이 있고
또 한 마리 수컷인 내가
여기저기 사냥터로 끌고 다녔다
먹이를 구하다가 지치고 병든
컹컹 우는 암사자를 업고
병원으로 뛰는데
누가 속을 파먹었는지
헌 가죽부대처럼 가볍다
이사랑, 바늘 끝에서 피는 꽃
청석골의 단골 수선집 늙은 재봉틀 한 대
아마, 지구 한 바퀴쯤은 돌고도 남았지
네 식구 먹여 살리고 아들딸 대학까지 보내고
세상의 상처란 상처는 모조리 꿰매는 만능 재봉틀
실직으로 떨어진 단추를 달아주고
이별로 찢어진 가슴과 술에 멱살 잡힌 셔츠를
감쪽같이 성형한다
장롱 깊숙이 개켜둔 좀 먹은 내 관념도 새롭게 뜯어고치는 재봉틀
작은 것들은 가슴을 덧대어 늘리고
막힌 곳은 물꼬 트듯 터주고 불어난 것들 돌려막으며
무지개실로 한 땀 한 땀 땀 구슬을 꿰어 서러움까지 깁고 있다
무더운 여름 낡은 그림자를 감싸 안고 찌르륵 찌르륵
희망은 촘촘 재생시키고 구겨진 자존심은 반듯하게 세워 돌려준다
일감이 쌓일수록 신나는 재봉틀 오늘도 허밍허밍 즐겁다
별별 조각난 별들을 모아 퀼트 하는 밤
바늘 끝에서 노란 달맞이꽃들이 환하게 피어났다
하상만, 목련
우주는 점이었다
고온과 고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졌다
빅뱅이라 부르는 이 사건으로
우주는 생겨났고
지금도 끝없이 팽창하고 있다
목련도 점이었다
점은 몽우리를 만들더니
터진 그곳에 꽃을 피웠다
꽃잎을 따 풍선을 부는 아이들의 입술이
봄을 퍼뜨리고 있었다
우주가 팽창하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점이었던 나를 어머니가 터뜨려주셨다
꽃이 진 목련과 아이들의 입술처럼
우리는 멀어졌지만
어머니는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