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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봄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 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이재무, 벽창호
도배 위해 낡은 벽지 떼 낸다
오래된 벽지는 고집이 세다
벽에 찰싹 붙어서
벽과 한 몸으로 살아온
지가 벽인 줄 아는 벽창호의
완강한 저항은 몸 지치게 하고
일 더디게 한다
동요하는, 고달픈 현재여
가까운 미래를 위해 악착같이
과거의 아집을 떼 내야 한다
하상만, 아침
고향에 돌아와
아침을 먹는다
아침을 적게 먹는 것은
내 오래된 습관
투정을 부리자
어머니가 말씀하신다
많이 담아야 밥은
빨리 식지 않는다고
어머니는 알고
나는 모르는 사랑이
아직 있다
공광규, 백운모텔
벌초하러 고향에 내려갔다가
먼지와 벌레가 주인이 되어버린 빈집을 나와
무량사 앞 한적한 모텔에 들었다
왠지 호젓하여 글이나 써볼까 하는데
쓸쓸쓸쓸 여치가 운다
나도 금방 쓸쓸해져서
젊은 나이에 병들어 울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도 생각나고
늙어서 불경을 외우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생각난다
혼자 사는 이혼한 여동생을 생각하다가 목이 메는데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벌레가 또 운다
풀벌레들은 먼 옛날 이 고장 주막에서
쓸쓸히 묵고 간 시인일지도 모른다
이시영, 지구별에서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아파트 베란다에 일자로 엎드려
늙어가는 지구의 시절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낙엽 밟는 바스락 소리에 놀라
벌레들은 땅 밑에서 또 깜빡, 뜨거운 알을 낳다 죽어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