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옥, 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
만나고 싶었던 사람
그 사람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봄이 온다
아무 곳에나 흩어져 있던 봄이
제자리를 찾아 달려오는 길목
풋내음 속으로
그 사람이 온다
박남준, 봄 편지
밤새 더듬더듬 엎드려
어쩌면 그렇게 곱게 썼을까
아장아장 걸어나온
아침 이파리
우표도 붙이지 않고
나무들이 띄운
연두빛 봄 편지
신혜경, 곰국
밤톨 같은 식구들 거느리고 살아가려면
버티는 힘 있어야지
가끔씩 찔러 주던 용돈 모아 큰맘 먹고 사 온
앞다리 하나, 잡뼈 한 소쿠리
우직한 무쇠 솥에 넣고서 정화수 같은 물
치성으로 채운다
묵혀 둔 아궁이에 장작 두엇 쌓아 놓고
눈물 땀물로 불을 지핀다
입김을 불 때마다 지난날들이 후, 후
불꽃으로 일어난다
한 놈 한 놈 차례대로 매달리던 젖줄 연
몽당 부지깽이 같은 어머니
평생 끓여 온 가슴으로 손수 젖을 끓이신다
끓이면 끓일수록 진하게 우러나오는
곰국 같은 마음을 끓이신다
불은 뭉근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소리 없이 지켜보던 그 눈길처럼
정태일, 측량
아지랑이 깔리는 산길에
측량기사 안 씨가 박고 있는 것은
말뚝이 아니다
햇빛에 지친 무료한 봄날도
푸른 산 그리메의 동백꽃도
이리저리 떠도는 동박새의 울음도 아니다
칼바람 앞에서도 피어나던 동벡꽃처럼
첩첩이 피어났다 스러져 간 수만 굽이
흐릿한 망원경 속으로
안 씨가 들여다보는 것은
가파르게 깎아지른 벼랑이다
티눈 박힌 굵어진 손가락 마디마다
휘돌아 나가는 바람을 안고
붉은 시간의 모래톱 위를
안 씨 그가
구부정하고 비탈진 생애를 측량하고 있다
송종찬, 꽃샘추위
겨울도 아닌 것이
봄도 아닌 것이
그대를 사랑하여 아프다
가늘게 내리는 눈발의 춤사위 따라가면
솜이불 밖 그대 발금 보일까
올듯말듯 올듯말듯
눈에 길이 막혀버렸는가
나는 기다리지만 그대는 쉬 오지 않는다
얼어붙은 우물가 꽉 막힌 펌프
떨리는 두 손 닿으면
울컥 속울음 솟구칠 것 같은
그대를 사랑하여 고드름 길게 자라나고
눈에 갇혀 오지 못하는가
인간도 아닌 것이
짐승도 아닌 것이
그대를 사랑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