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숙, 가족
오르막 산길에 까치발 딛고 서서
햇빛을 수혈받고 있는 나무 한 그루
쩍쩍 갈라진 몸피와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잎사귀 사이로 드러나는 가슴팍
무엇이 그토록 생에 대한 집착의 끈
놓지 못하게 했을까
새까맣게 썩은 그의 가슴팍에 주소를 옮기고
이삿짐을 부린 버섯과 벌레의 일가
제 안에 들어와 이젠 식솔이 되어버린 그들을
나무는 차마 내칠 수 없었던 것일까
다 함께 죽을 수도 없는 삶
이제 더 이상 혼자일 수 없는 그는
하늘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쟁여두었던 뿌리의 체온을 끌어올려
식솔들을 감싸 안는다
이른 봄 성치도 않은 나무의 몸에 피가 돌 듯
연푸른 잎사귀 돋는 것은
몸에 새긴 봄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긴 시간의 물살을 온몸으로 견뎌온 자만이
저 아닌 다른 것을
제 생의 빈터에 받아들인다
박지웅, 상업의 내력
목련 하나에 장정 여섯이 붙었다
한번 긴 실랑이가 끝나고
목련도 담장에 기대 쉬고 있다
삽날이 뿌리 탁탁, 끊어 들어올 때도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의연함은 때때로 구타로 이어진다
그를 묶고 몇몇은 억센 힘으로 줄 당기고
한둘은 돌아가며 발길질한다
후두둑 후두둑, 생니 쏟으며 앞으로 기우는
저 목련은 봄날의 약사기도 했다
해마다 그가 내민 흰 약봉지 받아가던
봄을 앓는 자들은 새로운 북카페에 앉아
유리창 갈듯 쉽게 풍경을 갈아치우는
상업의 내력에 붉은 밑줄을 그을 것이다
풍경은 대부분 환경에 먹히고
먹이사슬의 최고 단계에는 이윤이 있다
장정들이 더러운 기분으로 목련을 밟는다
봄날에 때 아닌 눈사태 푹푹, 길이
끊어지고 있다
이성부, 숨은 벽
내 젊은 방황들 추슬러 시를 만들던
때와는 달리
키를 낮추고 옷자락 숨겨
스스로 외로움을 만든다
내 그림자 도려내어 인수봉 기슭에 주고
내 발자국소리는 따로 모아 먼 데 바위 뿌리로 심으려니
사람이 그리워지면
눈부신 슬픔 이마로 번뜩여서
그대 부르리라
오직 그대 한 몸을 손짓하리라
김태형, 당신이라는 이유
발목께 짐을 내려놓고 서 있을 때가 있다
집에 다 와서야 정거장에 놓고 온 것들이 생각난다
빈 저녁을 애써 끌고 오느라
등이 무거운 비가 내린다
아직 내리지 못한 생각만 지나갈 때가 있다
다 늦은 밤 좀처럼 잠은 오지 않고
창문 가까이 빗소리를 듣는다
누가 이렇게 헤어질 줄을 모르고
며칠 째 머뭇거리고만 있는지
대체 무슨 얘길 나누는지 멀리 귀를 대어 보지만
마치 내 얘기를 들으려는 것처럼
오히려 가만히 내게로 귀를 대고 있는 빗소리
발끝까지 멀리서 돌아온
따뜻한 체온처럼 숨결처럼
하나뿐인 심장이 두 사람의 피를 흐르게 하기 위해서
숨 가쁘게 숨 가쁘게 뛰기 시작하던 그 순간처럼
곽효환, 조금씩 늦거나 비껴간 골목
바람 깊은 밤, 어느 골목 어귀
불 꺼진 반 지층 창문을 본다
외등 아래 앙상한 몸통을 드러낸 플라타너스에게
무성했던 잎새의 기억을 물었지만 그네는 답이 없다
저만치 서서 나는 인적 없는 창가에 귀 기울인다
그늘에 젖은 시계도 숨죽여 눈시울 붉히는 시간
그녀는 벌써 들어와서 잠이 들었을 수도, 아니
들어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수도 있다
나의 문은 공전의 속도로 열렸고
그녀의 문은 자전의 속도로 닫혔을 게다
한 쪽이 다 열렸을 때 다른 한 쪽은 끝내 닫히고 마는
푸르던 잎새를 다 떨구고 붉은 꽃을 기다리는 빈 꽃대의 시간
내 몸이 기억하는 그녀와
내 머리가 기억하는 그녀가
더러는 비껴간 것들과 조금씩 늦은 것들이
쓸쓸하고 공허하고 아프게 뒤섞이는 텅 빈 골목
어른거리는 축축한 물기를 훔치고 등을 돌리는 순간
나는 세상의 가장 깊은 어둠에 남겨질 것이다
하여 이 골목 끝에서 다시 그녀를 마주쳤으면
아니 이 골목을 다 벗어날 때까지 끝내 마주치지 않았으면
이렇게 막막하고 이렇게 치명적인
내가 정말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