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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먼 곳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 움큼, 한 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면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이원규, 뼈에 새긴 그 이름
그대를 보낸 뒤
내내 노심초사 하였다
행여
이승의 마지막일지도 몰라
그저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기만 해도
갈비뼈가 어긋나고
마른 갈잎이 흔들리면
그 잎으로 그대의 이름을 썼다
청둥오리 떼를 불러다
섬진강 산 그림자에 어리는
그 이름을 지우고
벽소령 달빛으로
다시 전서체의 그 이름을 썼다
별자리들마저
그대의 이름으로
슬그머니 바꿔 앉는 밤
화엄경을 보아도
잘 모르는 활자들 속에
슬쩍
그 이름을 끼워서 읽고
폭설의 실상사 앞 들녘을 걸으면
발자국
발자국들이 모여
복숭아뼈에 새긴 그 이름을
그리고 있었다
길이라면 어차피
아니 갈 수 없는 길이었다
배한봉, 능금의 빛나는 황홀을
붉은 능금 향긋하여 나는 먹을 수 없네
이 단내는 꽃의 냄새
나는 꽃향기를 깎을 수 없네
나보다 먼저, 나보다 더 오래, 능금 꽃 앞에서 울던 벌이여
이 한 알의 보석에 박힌 수백 개 태양을 나는 깎을 수 없네
달에 옥토끼가 살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오래 전에 알아버렸을지라도
이 붉은 능금의 빛나는 황홀을
나는 어찌할 수 없네
가슴의 두근거림을
능금빛 사랑의 믿음을
나는 차마 깎을 수 없네
박소유, 어두워서 좋은 지금
처음 엄마라고 불러졌을 때
뒤꿈치를 물린 것 같이 섬뜩했다
말갛고 말랑한 것이 평생 나를 따라온다고 생각하니
어디든 도망가고 싶었다
너무 뜨거워서
이리 들었다 저리 놓았다 어쩔 줄 모르다가
나도 모르게 들쳐 업었을 거다
아이는 잘도 자라고 세월은 속절없다
낯가림도 없이 한 몸이라고 생각한 건 분명
내 잘못이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이 복음이었나
앞만 보고 가면
뒤는 저절로 따라오는 지난날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깜깜 무소식이다
그믐이다
어둠은 처음부터 나의 것
바깥으로 휘두르던 손을 더듬더듬 안으로
거두어들였을 때 내가 없어졌다
어둠의 배역이
온전히 달 하나를 키워내는 것, 그것뿐이라면
그래도 좋은가, 지금
이윤학, 꼭지들
이파리 하나 붙어 있지 않은 감나무 가지에
무슨 흉터마냥 꼭지들이 붙어 있다
먹성 좋은 열매들의 입이
실컷 빨아먹은 감나무의 젖꼭지
세차게 흔드는 가지를
떠나지 않는 젖꼭지들
나무는
아무도 만지지 않는
쪼그라든 젖무덤들을
흔들어댄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저 짝사랑의 흔적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