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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8J1zSsdFliM
천수호, 꽃씨의 발바닥
꽃씨를 심은 저 보름이 지났는데
새싹은 머리카락 한 올 보여주지 않는다
측근이 전하는 말
꽃씨에겐 땅속 동면이 필요하다는 것
마치 죽은 듯이 꼼짝 않던 전복이
꿈틀, 제 몸의 이미지를 전복하듯이
딱딱하고 죽은 것이
아니 죽은 듯이 굳어 있던 꽃씨가
제 발바닥을 한번 만져본다는 것
발바닥이 꽝꽝 언 수행을 겪고서야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다는 것
내가 내 발보다 큰 남편의 슬리퍼를 질질 끌고
꽃밭으로 걸어 나와
쿵쿵, 타닥타닥, 발소리로 흔들어도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들
큰 슬리퍼 사이로 손 넣어
홁 묻은 찬 발바닥 슬쩍 쓸어본다
죽은 척 하는 것들끼리의
은밀한 교신
김태형, 소쩍새는 어디서 우는가
귀가 밝아진다는 건 그래도 슬픈 일만은 아니었다
지나간 다큐멘터리 자료를 찾아보고 있는데
작년 첫 울음 울다 간 소쩍새 한 마리
한 문장 속에서 다시 깃을 친다
홀로 밤늦게 찾아와 길게 목을 풀던 첫 손님
누군들 그 울음을 받아 적을 수 있었을까
늘 멀리만 보려던 닫힌 창가에 바짝 다가앉았다
손때 묻은 수첩을 꺼내든 이의 등 뒤로
눈이 까만 밤새가 울었다
올해 소쩍새 울음을 들으려거든
며칠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아니 더 늦을지도 모른다고 바람이 아직 차다고
그때나 한번 찾아와 보라고
정작 나는 그 새가 언제 우는지 기다려지기보다
어디서 우는지 울어야 하는지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
저 울음이 배어나왔을 저녁 어둠은
아직 창밖의 나무옹이 속에 웅크려 있었다
저물녘 누군가 앉아 있던 자리도 그러하였을 것이다
울창하고 맑은 밤의 창을 가진 이가 부러운 게 아니었다
아직 내 마른 묵필은 그 어둠을 가질 수 없었다
최창균, 자작나무 여자
그의 슬픔이 걷는다
슬픔이 아주 긴 종아리의 그
먼 계곡에서 물 길어올리는지
저물녘 자작나무숲
더욱더 하얘진 종아리 걸어가고 걸어온다
그가 인 물동이 찔끔
저 엎질러지는 생각이 자욱 종아리 적신다
웃자라는 생각을 다 긷지 못하는
종아리의 슬픔이 너무나 눈부실 때
그도 검은 땅 털썩 주저앉고 싶었을 게다
생의 횃대에 아주 오르고 싶었을 게다
참았던 숲살이 벗어나기 위해
또는 흰 새가 나는 달빛의 길을 걸어는 보려
하얀 침묵의 껍질 한 꺼풀씩 벗기는
그는 누군가에게 기대어보듯 종아리 올려놓은 밤
거기 외려 잠들지 못하는 어둠
그의 종아리께 환하게 먹기름으로 탄다
그래, 그래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
종아리가 슬픈 여자
그 흰 종아리의 슬픔이 다시 길게 걷는다
송찬호, 동백이 활짝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
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
바람이 저 동백꽃을 베어물고
땅으로 뛰어내리기 전에
나호열, 제비꽃이 보고 싶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들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보았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떠들었다
듣지 않는 귀
보지 않는 눈
말하지 않는 혀
그래도 봄바람은 분다
그래도 제비꽃은 돋아 오른다
뜯어내도 송두리째
뿌리까지 들어내도
가슴에는 제비꽃이 한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