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그리움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알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찿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도 더욱 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손남주, 전송(餞送)
간이역 간판에
시간이 멈춰섰다
철길 옆으로 비켜선
코스모스 환한 속울음이
야윈 햇살을 붙잡고 흔들린다
기차는 길게 떠나고
나는 한 점
소실점으로 남는다
역사(驛舍) 안으로 들어서는
바람의 속이 텅 비었다
박소유, 그곳 간판
그 앞에서 몇 번이나 속도위반에 걸렸다
그래서 숙천반점 간판을 못 보고 온 날은 불안하다
며칠 후면 어김없이 과태료 통지서가 날아오기 때문이다
은혜건강원 간판은 멀리서도 잘 보이는데
숙천반점 감판은 잠시 딴 생각하면 지나쳐 버린다
세상에서 그렇게 작은 반점은 본 적도 없고
문짝마다 붉게 쓰인 양념닭 찜닭 튀김닭을 먹으려고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자장면이 없는 숙천반점은
물 흐르지 않는 금호강과 비슷하다
사람들이 그 앞에서 무조건 달리는 것은
커브에서 직선으로 넓어진 도로 탓이 아니다
복사꽃 분홍 비탈이 없어진 지 오래된, 그곳에선
아무도 한눈을 팔지 않는다
어느 날 과속 감시 카메라가 없어졌다
다시 속도를 되찾았으니
내게는 숙천반점이 없어진 거나 마찬가진데
그렇게 보이지 않던 간판이 이상하게 눈에 잘 띈다
그 간판이 나보다 먼저 속도를 버린 까닭이다
심보선, 말들
우리가 영혼을 가졌다는 증거는 셀 수 없이 많다
오늘은 그중 하나만 보여주마
그리고 내일 또 하나
그렇게 하루에 하나씩
김태형, 당신 생각
필경에는 하고 넘어가야 하는 얘기가 있다
무거운 안개구름이 밀려들어
귀밑머리에 젖어도
한번은 꼭 해야만 되는 얘기가 있다
잠든 나귀 곁에서
나귀의 귀를 닮은 나뭇잎으로
밤바람을 깨워서라도
그래서라도 꼭은 하고 싶은 그런 얘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