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희, 외상값
어머니
당신의 뱃속에
열 달동안 세들어 살고도
한 달치의 방세도 내지 못했습니다
어머니
몇 년씩이나 받아먹은
따뜻한 우유값도
한 푼도 갚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이승에서 갚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저승까지
지고 가려는 당신에 대한
나의 뻔뻔한 채무입니다
함민복, 성선설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오규원, 소년과 나무
한 소년이 나무를 끌어안고
앞을 보고 있다 햇빛이
벽처럼 앞을 가리고 있다
앞이 파도치는지 나무가 파도치는지
두 팔로 나무를 가슴에 바짝 끌어안고
눈을 찡그리고 한 소년이 나무 뒤로
한쪽 귀를 따로 숨기고 있다
나무는 앞을 보지 않고 처음부터
위를 본다. 그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하늘이다
그림자들은 아예 하늘을 보고 눕는다
돌들은 그래도 어깨를 바람 속에 내놓고
구를 시간을 익힌다
한 소년이 그러나 나무를 끌어안고
앞을 보고 있다 앞을 바라보는
두 눈의 동자는 칠흑이다
김경미, 야채사(野菜史)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고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고 한다
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 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 나왔든가
박성우, 봄, 가지를 꺾다
상처가 뿌리를 내린다
화단에 꺾꽂이를 한다
눈시울 적시는 아픔
이 악물고 견뎌내야
넉넉하게 세상 바라보는
수천개의 눈을 뜰 수 있다
봄이 나를 꺾꽂이 한다
그런 이유로 올봄엔
꽃을 피울 수 없다 하여도 내가
햇살을 가지러워하는 건
상처가 아물어가기 때문일까
막무가내로 꺾이는 상처
없는 사람은 꽃눈을 가질 수 없다
상처가 꽃을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