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근, 물의 자리
물 위로 꽃 한 송이 피어난다
나 오래 물의 자리에 내려앉고 싶었다
더 깊이 가라앉아
꽃의 뿌리에 닿도록
아픈 몸이여, 흘러라
나 있던 본디 자리로
권순자, 게장
짭조름한 맛
플라스틱 항아리에 담겨
안간힘으로 버티다 생긴 멍울들이
거멓게 뭉쳐 있다
잡혀, 기진할 때까지 뱉어낸 비명도
살아있음의 짙은 향기 비린내도
간장에 절여져
간헐적인 충격과 통증이
소금기에 점점 졸아들고 가라앉아 갔다
절벽의 시간 앞에서 보낸 체념의 나날
극한의 반항이 잠들고
아픔도 영영 사라져
끝내 멍울이 터뜨리는 말
검은 무늬로 새겨
내 혀에다 전해주고 있다
김영남, 성에꽃
바람이 차고 푸르다
창밖엔 삐거덕삐거덕거리는 소리
청둥오리들 감나무 사이 무더기로 날 때
오리들은 누구의 집에 들러
대문 저리 슬프게 열며 지나가는 걸까
내가 열리면 난 무엇으로 영접할까
이럴 때 난 툇마루에 나앉아
앵강만으로 떠나 서포, 그 돌아오지 않은
흰 옷자락을 생각한다
서글픈 이야기 하나 문질러본다
문정희, 신록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구나
솔개처럼 푸드득 날고만 싶은
눈부신 신록, 예기치 못한 이 모습에
나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지난 겨울 깊이 박힌 얼음
위태로운 그리움의 싹이 돋아
울고만 싶던 봄날도 지나
살아 있는 목숨에
이렇듯 푸른 노래가 실릴 줄이야
좁은 어깨를 맞대고 선 간판들
수수께끼처럼 꿰어다니는
물고기 같은 차들도
따스한 피 돌아 눈물겨워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참고 기다린 것밖엔
나는 한 일이 없다
아니, 지난 가을 갈잎 되어
스스로 떠난 것밖엔 없다
떠나는 일 기다리는 일도
힘이 되는가
박하 향내 온통 풍기며
세상에 눈부신 신록이 왔다
최정례, 숲
한 나무에게 가는 길은
다른 나무에게도 이르게 하니
마침내
모든 아름다운 나무에 닿게도 하니
한 나무의 아름다움은
다른 나무의 아름다움과 너무 비슷해
처음도 없고 끝도 없고
푸른 흔들림
너는 잠시
누구의 그림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