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균, 향수(鄕愁)
저물어 오는 육교 위에
한 줄기 황망한 기적을 뿌리고
초록색 램프를 달은 화물차가 지나간다
어두운 밀물 우에 갈매기 떼 우짖는
바다 가까이
정거장도 주막집도 헐어진 나무다리도
온-겨울 눈 속에 파묻혀 잠드는 고향.
산도 마을도 포플라나무도 고개 숙인 채
호젓한 낮과 밤을 맞이하고
그 곳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조그만 생활의 촛불을 에워싸고
해마다 가난해 가는 고향 사람들
낡은 비오롱처럼
바람이 부는 날은 서러운 고향
고향 사람들의 한 줌 희망도
진달래빛 노을과 함께
한번 가고는 다시 못 오지
저무는 도시의 옥상에 기대어 서서
내 생각하고 눈물지움도
한 떨기 들국화처럼 차고 서글프다
김종길, 외등
어두운 골목길을 밝히는
외등 불빛의 노오란 동그라미
호젓하다 못해 외롭게까지 보인다
그러나 어둠 속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겐
그 불빛이 얼마나 따스해 보일 것인가
두려움을 내몰고 아늑함을 안겨주는 것이니
시(詩)도 외등 불빛 같은 것이나 아닐런지
그 자체는 외롭고 슬프고 쓸쓸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다사롭게 감싸주니
오세영, 설화
꽃나무만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 것은
겨울의 마른 나뭇가지에 핀 설화를 보면 안다
누구나 한 생애를 건너
뜨거운 피를 맑게 승화시키면
마침내 꽃이 되는 법
욕심과
미움과
애련을 버려
한 발 재겨 디딜 수 없는
혹독한 겨울의 추위, 그 절정에
홀로 한 그루 메마른 나목으로 서면
내 청춘의 비린 살은 꽃잎이 되고
굳은 뼈는 꽃술이 되고
탁한 피는 향기가 되어
새파란 하늘을 호올로 안느니
꽃나무만 꽃을 피우지 않는다는 것은
겨울의 마른 나뭇가지에 핀 설화를 보면 안다
손진은, 중년
열쇠를 돌리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문득 등을 끄지 않은 채 차에서 내린 간밤의 기억이
몰려온다 낭패, 눈꺼풀도 내리지 않고
정신없이 꿈속을 헤매는 사이 핏기를 잃어버린 내 눈알
어떤 것에 뒤집혀 긴 밤 긴 생을
후들거리는 다리와 텅 비어가는 머리도 모른 채
내 헤드라이트는 발광했을 것이다
무언가에 홀려 뚫어지게 바라보는 동안
계절은 가고 주름살은 깊어졌고 흰 머리는
늘어났다 어디로 가는가 철철 넘치던 팔뚝의 푸른 힘줄은
전류처럼 터져 나오던 생기, 머릿속을 흐르던 생각은
어느 허공으로 날아가버리고
까칠하고 초췌해진 몸뚱이로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는가
어저께까지도 명품이라고 믿었는데
눈 한번 들었다 내려놓는 사이
어떤 것에 취해 이렇게 떠밀려온
두드려도 가없는 무슨 소리만 내보내고 있는
중년을 일으키려 저기, 정비기사가 달려온다
또 하나의 몸이 부끄러운 듯 마중하러 간다
김복연, 어떤 화해
나는 바다를 숭배하진 않지만
위에 계신 그 분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 자주 한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것과
그 오랜 세월 묵묵부답이 매번 응답인 것도
흡사하다 뒷골목 같은 내 사랑은
시도 때도 없이 파랑치는데
사랑 따윈 철 지난 이데올르기쯤으로 취급하는 것도
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것도 닮았다
그러고 보니 내 불평과 서운함이 오래된 만큼
저 바다도 참 많이 늙었다
기름 냄새 흉흉한 송도 부두 지날 때
듬성듬성한 외진 솔밭 길 지날 때
조금은 눈치챘지만 막상 가까이서 보니
허둥허둥 벌써 또 멀다 아득하다
전에는 늘 내가 먼저 등 돌렸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저 노구의 등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