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ADePH_VK4Eo
김재훈, 월식
너는 너의 바깥에 서 있었다
손에 쥔 모래를 표정 없이 떨어뜨리는 소녀가
생각 없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주먹 속의 모래가 모두 빠져나간 뒤에
문득 놀라 빈 손바닥을 펼쳐 볼 때
처음 들른 여인숙 방의 형광등 스위치를 더듬듯이
너는 내 안으로 들어왔다
어디 갔다 온 거니 손이 차구나
정정지, 물꼬
넘치려하고 있다
장마철 강 하류처럼
잡동사니로 가득 채인 가슴 속이 들끓고 있다
전화가 왔다
송화기 속으로 탁류가 흘러간다
쉼없이 빨려 들어간다
긴 통화가 끝났다
낮아진 수위
수면 잔잔하다
이상국, 마음에게
마음이여
쓸데없이 돌아다니다가
피곤하니까 돌아온 저를 데리고
나는 자전거처럼 가을에 기대섰다
구름을 보면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강가에 가면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여
때로 세상으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내가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하면
늘 알아서 하라던 마음이여
저는 늘 내가 아니고 싶어 했으나
내가 아닌 적도 없었던 마음이여
그래도 아직 사용하지 않은 슬픔이 있고
저 산천에는 기다리는 눈 비가 있는데
이까짓 지나가는 가을 하나에
저나 나나 속을 다 내보이지는 못하고
오늘 하루쯤 같이 지내면 어떠냐니까
그렇게 하자고 하며
내 어깨에 제 몸을 기대는 마음이여
이태수, 눈 감고 눈 뜨기
눈 뜨고 바라보면 보이지 않는다
눈 감고 나를 들여다본다
길 위에서 길을 잃고 떠돌던 내가
느릿느릿, 내 안으로 되돌아온다
앞모습도 가까이 보인다
제각각 달리던 길들과 바람소리도
나를 따라 내게 들어온다
발목 잡듯 허둥지둥 일제히 쳐들어온다
이내 제 길로 되돌아간다
이윽고 낯익은 모노톤의 그림 한 장
이 수묵빛 번지는 풍경 속에는
눈을 감아야 보이는 내가 눈뜬다
길을 찾아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밤하늘의 별처럼 어둠 속에서 눈뜬 내가
나를 떠나 다시 아득한 길을 나선다
강문숙, 촛불의 노래
푸른 새벽이 올 때까지
나 그대를 밝혀주는 촛불이 되고 싶네
날이 밝아도 아직 그대 마음 어둡다면
그 어둠의 빛으로 남아 있다가
눈부신 아침을 열어주고 싶네
길이 끝났다고 그대 말한다면
길은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된다는 걸
저 나뭇가지 사이로 비추는 달처럼
조용한 빛으로 말해주고 싶네
세월이 가고, 아득히 그대 향한
그리움마저 기억할 수 없는 날
탈 대로 다 태우고
하얗게 속살마저 태우고, 그제사
옥 같은 눈물이 되어
소리 없이 흐르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