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순, 서천
누군가 빨간 수박 반쪽을 먹다가
서산 골짜기 위에 걸쳐 놓았다
참 달디달게 생겼다
마침 갈증이 나던 차에
아삭아삭 단물 흘리며 마저 먹어 버리려고
손을 뻗어 수박을 집으려는 순간
어두운 하늘이
나보다 먼저 순식간에 먹어치워 버린다
먹으며 흘린 수박물만 서산 위에 붉게 젖는가 했더니
곧 말라 버린다 깜깜한 어둠이다
더욱 목이 탄다
홍일표, 위독한 연애
붉게 달아오른 몸에서 굴러 나오는
달과 별의 동그란 생각들을 봐
그걸 혹자는 위험한 사랑으로 번역하네
혀가 꼬여 발음이 잘 되지 않지만
저녁은 언제나 죽음의 방식으로 오지
달콤한 매혹의 혀가 당신이 살아온 밤을 핥고 있을 때
차갑게 타오르는 불의 심장에 손을 넣어봐
태양을 직역하는 한 알의 사과처럼
손가락이 불붙어 타오르고
가슴에서 여러 개의 사과알이 두근거리는 동안
사과나무의 뭉툭한 발굽 밑에서
죄 없이 얼굴 붉어진 저녁이 몸을 숨기는 것 좀 봐
당신이 밤을 관통할 때 빗줄기를 따라 우는 머리카락처럼
지금은 해를 구워 토스트에 얹어먹는 캄캄한 아침
김지율, 캐치볼
그해 여름
초록은 어두워지고
우리는 마음이 급했다
나의 공은 울퉁불퉁했고
그의 공은 개방적이었다
몸이 풀리자
공의 스피드는 조금씩 빨라졌다
갑자기 검정이 지나가자
잠시 조용했다
그해 여름
살아남은 사람이 죽은 사람보다 많았다
나는 떨지 않고 공을 던졌고
떨어진 공들의 시간과
가로등이 켜지는 시간 사이에서
자주 머뭇거렸다
내가 던진 공들은 물속에서
가끔 이름을 잊어버렸고
어떤 공의 그림자들은 멀리 사라졌다
그해 여름
파랑은 계속 내렸고
공이 사라진 쪽에서
짐승들의 우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홍윤숙, 나의 사전에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았다
꿈꾸는 것은 뒷모습뿐이었다
나의 사전엔
그럼에도 기다리고 꿈꾸는 일만이
지상의 숙제, 살아가는 의미라고
사람들은 다투어 뿔뿔이 길을 떠났다
청솔가지 한 점씩 가슴에 분지르며
온 밤 식은땀 흘리며
자라지 않는 꿈 가위 눌리며
무거운 등짐 지고 넘어간 산을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올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윽고 빈 집에 백발이 되어버린
기다림 혼자
창가에 먼지 쓰고 늙어갔다
끝내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았고
꿈꾸는 것은 뒷모습뿐이었다
나의 사전에
이성부, 길 아닌 곳에 들다
수북이 잠자는 낙엽들 뒤흔들어
깨워놓고 가는 내 발걸음 송구스럽다
놀라지들 말거라
나도 이파리 하나
슬픔을 아는 미물일 따름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