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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리, 불안도 꽃인 것을
누가 알기나 했을까
불안이 꽃을 피운다는 것을
처음으로 붉은 피 가랑이에 흐를 때
죽고 싶다 할 때마다 조마조마 꽃이 피었던 걸
불안으로 한 아이를 낳고
불안으로 젖을 먹이고 몸을 씻기는 동안
불안 속에서 꽃이 피고 있었네
불안은 불안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속에 오래 있으면
기막히게 불안에도 쾌감이 있다는 걸
아이가 젖꼭지를 깨물었을 때라 할까
아니면 불륜, 불법, 불신, 불가능의 한 때라 할까
불안으로 시험을 치고 낙방을 하고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고
그때마다 불안의 꽃이 피었던 걸
그 다음 시절이 일러주었네
수많은 당신이 불안이었던 걸 말해도 될까
초경 때처럼 깜빡 죽고 싶었던 걸 말해도 될까
눈부신 구름 꽃 바람 꽃
비가 되었던 물의 꽃
꽃은 불안을 알지 못하지만 불안은 꽃을 알아보더군
천날 만날 내일이 불안하고 휴일이 불안하고
지나온 길
그 불안으로 꽃을 피웠으니
여기 이 꽃 무덤들, 이 불안의 무게들
홍윤숙, 낙법(落法)
일찍이 낙법을 배워 둘 것을
젊은 날 섣부른 혈기 하나로
오르는 일에만 골몰하느라
내려가는 길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어느덧 전방엔 ‘더는 갈 수 없음’의
붉은 표지판
석양을 등지고 돌아선 너의
한쪽 어깨 이미 어둠에 묻히고
발밑에 돌무더기 시시로 무너져내리는
아슬한 벼랑 끝에 외발로 섰다
세상에 진 빚과 죄로
몸보다 무거운 영혼의 무게
추슬러 이마에 얹고
남은 한 발 허공에 건다
아득하여라
해 아래 떨어지는 모과의 향기
바람에 섞이듯 그렇게
사라지는 소멸의 착지(着地) 그
아름다운 낙하를
김선호, 종이 인형
당신의 손끝에서 태어난
지문을 먹고 자랐다
심장에 붉은 꽃을 색칠하며 내 몸에 무늬를 그리던
색연필로 그려진 입술이
크게 웃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급히 구석에 처박고
발자국 소리를 마침표로 남기고 떠난 후
기를 쓰고 늘려도 자라지 않는 키와
무릎에서 펄럭임을 멈춘 스커트 자락
글썽이는 눈물은 눈썹에 맺혀 떨어질 줄 모른다
나는 처음부터 만져지는 얼굴은 아니었다
구겨지고 나서야
눌려진 감정은 원상태로 돌아갈 듯 움직이고
파지 조각으로 자릴 때마다 터지는 웃음
뒷면에 흰 백지를 남겨놓고
당신의 잃어버린 무늬를 기다린다
장덕천, 내 마음의 보수공사
집에 페인트 칠을 한다
햇잎 같은 연초록색이다
때 절은 나무결
툭툭 부딪혀 패인 자리
좀먹어 허물어진 모서리
못에 박혀 흠집 난 구멍들
오랫동안 돌보지 못한
집의
몸
거미줄처럼 진을 치고 있는 허물들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투명하게 걸러진 햇살이 집 안에 환하다
초록빛 향내가 그득하다
이제 내 마음의 낡은 집도 칠을 해야 한다
때 절고 허물어진 자리마다
햇잎처럼 갓 피어난
순수한 빛깔로
영혼의 보수공사를 해야겠다
유훈옥, 작아져서
작아져서 작아져서
아주 아주 작아져서
내 아픔 콕콕 쑤셔대던
너의 핏줄로 들어가서
너의 온몸 구석구석 떠돌아다니며
너랑 함께 오래도록 살아보고 싶다
경계도 없고 보초병도 없는
국경은 더더욱 필요도 없는
너와 나
애증, 그 피끓는 혈관에서
꿈도 잠도 필요없이 함께 살고 싶다